한국의 영토 -독도- (텍스트, 국한문혼용 버전) 제2절

2018. 5. 7. 00:59대한민국 독도

   제2절 독도문제(獨島問題)에 있어서의 계쟁점(係爭點)

 

(()) 독도(獨島)는 일본(日本)고유(固有)의 영토(領土)인가.

 

일본정부(日本政府) 및 대다수(大多數)의 일본학자(日本學者)는 독도(獨島)가 일본(日本) 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한다[각주:1]. 동시(同時)에 한국측(韓國側)도 거의 동일(同一)한 주장(主張)을 되풀이하고 있다[각주:2]. 이것은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에서 쌍방(雙方)의 당사자(當事者)는 각각 Ecrehos Minquiers에 대하여 옛날부터의 내지는 원시적(原始的) 권원(權原)을 가지며 그러한 권원(權原)은 항상 유지(維持)되어 왔고 상실(喪失)된 일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主張)하고 있는 것[각주:3]과 같이 한일(韓日) 쌍방(雙方)은 각각 역사적(歷史的) 권원(權原)(historic title)또는 원시적(原始的) 권원(權原)(original title)을 고집(固執)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도문제(獨島問題)도 상기(上記)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주지(無主地)의 주권취득(主權取得)에 관한 분쟁(紛爭)의 특징(特徵)을 띄고 있는 않은 것것이 분명(分明)하다. 다만 소수(小數)의 일본학자(日本學者)는 독도(獨島)가 일본(日本) 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는 다수설(多數設)에 따르지 않고 독도(獨島)를 무주지(無主地)로 보는 동시(同時)에 독도(獨島)편입(編入)을 이른바 무주지(無主地)의 선점(先占)이라는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이론(理論)으로써 정당화(正當化)하고 있다[각주:4]. 그러면 독도(獨島)는 역사적(歷史的) 및 원시적(原始的)으로 일본(日本) 고유(固有)의 영토(領土)인가. 일본(日本)이 독도(獨島)편입(編入)1905년 이전(以前)에 이미 독도(獨島)가 일본본토(日本本土)와 같은 고유(固有)의 영토(領土)였던가, 우선 이 문제(問題)부터 검토(檢討)할 필요(必要)가 있다.

일본정부(日本政府)는 말하기를 국제법상(國際法上) 어느 지역(地域)이 옛날부터 일국(一國)의 고유(固有)의 영토(領土)인가 아닌가에 관해서는 그 국가(國歌)가 문제(問題)의 지역(地域)에 대해서 이것을 어떻게 실효적(實效的)으로 지배경영(支配經營)해 왔는가가 가장 결정적(決定的)인 요소(要素)[각주:5]라고 하면서 이조초기(李朝初期) 한국정부(韓國政府)가 울릉도(鬱陵島)에 대해서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채용(採用)한 당시(當時) 일본인(日本人)이 동도(同島)를 왕래(往來)하는 도중(途中) 독도(獨島)에 기항(寄港)하였고 미자(米子)의 정인(町人) 대곡심길(大谷甚吉)과 촌천시병위(村川市兵衛) 등이 1618년 정식(正式)으로 막부(幕府)로부터 울릉도(鬱陵島)의 도해면허(渡海免許)를 얻어 그 경영(經營)에 종사(從事)하는 동시(同時)1656년 또는 그 이전(以前)에 대곡가(大谷家)가 독도(獨島)를 배령(拜領)하여 이것을 독점적(獨占的)으로 경영(經營)하는 면허(免許)를 얻었다고 한다. 동시(同時)에 일본정부(日本政府)가 강조(强調)하는 것은 이러한 개인활동(個人活動)이 마치 막부(幕府)(일본정부(日本政府))의 공인하(公認下)에 실행(實行)된 것처럼 말함으로써 대곡(大谷) 등의 활동(活動)이 국가적(國家的) 활동(活動)을 형성(形成)한다는 의미(意味)를 강()하게 표시(表示)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1696(원록(元錄) 9) 1월에 덕천막부(德川幕府)가 울릉도(鬱陵島)의 포기(抛棄)를 결정(決定)하였으나 독도(獨島)에의 도항(渡航)은 금지(禁止)되지 않았으며 당연(當然)히 일본영토(日本領土)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각주:6].

1905년 이전(以前) 일본(日本)의 독도(獨島)에 대한 지배경영(支配經營)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大體)로 고작해서 상술(上述)한 정도(程度)에 그치는 것이고 이것으로써 일본측(日本側)이 독도(獨島)에 대한 고유(固有)영토설(領土設)을 주장(主張)하는 유일(唯一)의 근거(根據)로 삼고 있음을 보았다. 한국정부(韓國政府)가 일정기간(一定其間) 울릉도(鬱陵島)에 대하여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취한 것은 사실(事實)이나 유기의사(遺棄意思)[각주:7]를 표명한 일은 없다. 공도정책(空島政策)도 하나의 정책(政策)인 이상(以上) 주권(主權)의 발현(發現)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 1696년 일본정부(日本政府)가 울릉도(鬱陵島)의 포기(抛棄)를 결정(決定)하였다는 것은 당연(當然)하다기보다 당연(當然) 이전(以前)의 행위(行爲)가 아닌가. 이러한 울릉도(鬱陵島)가 공도(空島)로 있던 틈을 타서 약간(若干)의 일본인(日本人)이 이곳에 잠입(潛入)하는 도중(途中) 독도(獨島)에 기항(寄港)한 사실(事實)을 가지고 독도(獨島)를 실효적(實效的)으로 경영(經營)하였다는 것, 따라서 독도(獨島)가 일본(日本) 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는 것을 결론(結論)한다면 참으로 웃지 못할 논리(論理)의 전개(展開)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일본정부(日本政府)가 채용(採用)하는 몇가지 용어(用語) 가운데 일본어부(日本漁夫)가 울릉도(鬱陵島)나 독도(獨島)를 막부(幕府)로부터 배령(拜領)하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과연(果然) 누구의 영토(領土)를 누가 배령(拜領)케 할 권한(權限)이 있었단 말인가. 더욱이 어부(漁夫)들의 그러한 기항(寄港) 및 어로활동(漁撈活動)이 무슨 국가적(國家的) 활동(活動)이나 되는 것처럼 과대(誇大)한 표현(表現)을 구사(驅使)하고 있으나 이것을 입증(立證)할만한 자료(資料)는 빈약(貧弱)한 것 같다[각주:8].

1696년의 결정(決定) 이후(以後) 일본(日本)은 계속에서 명치(明治) 초년(1877~78)에도 독도(獨島)가 일본령(日本領)이라는 명확(明確)한 인식(認識)을 가졌다고 강조(强調)하나[각주:9] 명치정부(明治政府)가 당시(當時) 독도(獨島)를 한국령(韓國領)으로 보고 그 간()의 사정조사(事情調査)를 위하여 외무성관리(外務省官吏) 3인을 한국(韓國)에 파견(派遣)하였다는 사실(事實)을 무엇으로 설명(說明)한다는 것인가. 명치(明治) 2년 명치정부(明治政府)를 좌전백유(佐田白葇), 삼산무(森山茂), 제등영(齊藤榮) 등의 3인을 파견(派遣)하였는데 그 때 외무성(外務省)이 지령(指令)한 조사사항(調査事項)에는 송도(松島)와 죽도(竹島)의 조선부속(朝鮮附屬)에 관한 항목(項目)이 있으며 3인의 조사보고서(調査報告書)조선국교제시말내택서(朝鮮國交際始末內擇書)에는 죽도(竹島)송도(松島)가 조선부속(朝鮮附屬)으로 된 경위(經緯)에 관한 보고(報告)도 있고 여기에 기록(記錄)된 바 송도(松島)(독도(獨島))는 죽도(竹島)(울릉도(鬱陵島))의 인도(隣島)로서 송도(松島)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게재(揭載)된 서류(書留)가 없다[각주:10]라는 주목(注目)할 만한 구절(句節)이 발견(發見)된다. 명치정부(明治政府)의 외무성관리(外務省官吏)의 보고(報告)가 이럴진대 1696년 및 그 이후(以後) 1877년에서 1905년에 이르기까지 독도(獨島)가 일본(日本) 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고 생각했다는 일본정부(日本政府)의 공식견해(公式見解)는 한낱 허위(虛僞)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독도(獨島)의 일본(日本) 고유(固有)영토설(領土設)에 대하여 그 허위성(虛僞性)을 여지(餘地)없이 폭로(暴露)할 학설(學說)로서 산변건태랑씨(山邊健太郞氏)의 다음 일절(一節)을 인용(引用)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명치(明治) 14년 울릉도(鬱陵島)의 소속(所屬)이 한국령(韓國領)으로 결정(決定)되었는데 당시(當時) 지금의 독도(獨島)에 관해서는 아무런 협정(協定)도 성립(成立)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본(日本)은 당시(當時) 독도(獨島)도 포기(抛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독도(獨島)에의 관심(觀心)이 울릉도(鬱陵島)만큼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독도(獨島)의 귀속문제(歸屬問題)의 역사(歷史)를 생각하는 경우 덕천시대(德川時代)에 이섬이 일본인(日本人)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따위의 의논(議論)은 문제(問題)가 되지 않는다. 만약 독도(獨島)의 귀속(歸屬)이 그때까지 결정(決定)되어 있었다면 새삼스럽게 명치(明治) 382월 독도편입(獨島編入)의 고시(告示)를 내는 것은 도리(道理)에 맞지 않는다. 일본(日本)의 외무성(外務省) 등이 최근(最近) 독도(獨島)의 영유(領有)에 관하여 논()하면서 이 섬의 일본(日本) <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유(固有)>라는 말의 정의(定義)는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는 것을 조사(調査)하는 중()에 이동사대치(伊東巳代治) 문서(文書) 속에 <제국판도(帝國版圖)>라는 문서(文書)가 있는 것을 발견(發見)하였다. 이것은 <제국헌법(帝國憲法)>의 제정시(制定時)에 헌법(憲法)이 시행(施行)될 지역(地域)에 관하여 조사(調査)한 것인데 이 중()<고유(固有)의 영토(領土)>의 정의(定義)가 있었다. 이것에 의하면 제국(帝國)<고유(固有)의 영토(領土)>는 신화(神話)에 있는 바와 같이 본주(本州)사국(四國)담로도(淡路島) 이다 라고 명백(明白)히 쓰여 있다. 나는 이것을 일본사가(日本史家)에게 말했더니 <그야 말로 명백(明白)한 정의(定義)>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볼지라도 독도(獨島) <고유영토(固有領土)>()이 근거(根據)가 없음을 알 것이다[각주:11].

그 밖에도 전술(前述)리양고도()편입(編入) 및 대하원(貸下願)에는 독도(獨島)의 영토소속(領土所屬)이 미정(未定)이라는 어구(語句)가 발견(發見)되고 있으며 이 청원(請願)을 받아들인 일본정부(日本政府)의 내무대신(內務大臣)이 각의(閣議)에 제출(提出)한 의안(議案)에서도 이것을 충분히 인정(認定)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의안(議案)에 대한 각의결정(閣議決定)이라는 것도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라고 하는 자가 그 섬(독도(獨島))에 이주(移住)하여 어업(漁業)에 종사(從事)한 사실(事實)국제법상(國際法上) 점령(占領)(선점(先占))의 사실(事實)[각주:12]이 있는 것으로 간주(看做)한 것은 명백(明白)하다.

위와 같이 일련(一連)의 일본측(日本側) 문헌(文獻)은 정당(正當)하게도 독도(獨島)가 일본(日本)고유(固有)의 영토(領土)가 아니고 1905년에 무주도(無主島)를 선점(先占)했다는 국제법상(國際法上)의 논리(論理) 위에 입각(立脚)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도(獨島)에 대한 원시적(原始的) 내지(乃至) 역사적(歷史的) 권원(權原)의 존재(存在)를 스스로 부인(否認)하고 말았다. 사실(事實) 고유영토(固有領土)의 새삼스러운 영토편입(領土編入)이란 자기모순(自己矛盾)이며 자신(自身)의 허위성(虛僞性)을 스스로 노정(露呈)하는 것이며 어떠한 강변(强辯)을 가지고도 정당화(正當化)할 수 없는 부조리(不條理)가 아닐 수 없다.

 

(()) 독도(獨島)편입(編入)의 효력(效力)

 

1905(명치(明治) 38)의 일본(日本)에 의한 독도(獨島)편입(編入)은 과연(果然) 유효(有效)한 것인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한국정부(韓國政府)편입(編入)조치(措置)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1904223)제일한일협약(第一韓日協約)(1904822)을 강제(强制)하고 한국(韓國)의 외교권(外交權)을 실질상(實質上) 박탈(剝奪)하여 필요(必要)하다면 전략적(戰略的) 입장(入場)에서 어떠한 한국영토(韓國領土)도 점유(占有)할 수 있으며 또한 한국정부(韓國政府)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에 이의(異議)를 제출(提出)할 여지(餘地)조차 없는 조건하(條件下)에서 행()해진 것이므로 무효(無效)라고 주장(主張)한다[각주:13].

이에 대한 일본정부(日本政府)의 태도(態度)는 어떤가. 외무성(外務省)은 말하기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4조의 규정(規定)은 원래(元來) 로일전쟁(露日戰爭)에서 한국(韓國)의 영토보전(領土保全)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하여 필요(必要)에 응()하여 군략상(軍略上) 필요(必要)한 지점(地點)을 일시적(一時的)으로 사용(使用)할 것을 약정(約定)한데 불과(不過)하며 독도(獨島)의 방영편입조치(邦領編入措置)와는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각주:14]라고 한다. 동시에 일본정부(日本政府)가 추천(推薦)한 외국인(外國人)은 미국인(美國人)이며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의 외교권(外交權)에 간섭(干涉)한 사실(事實)이 없으며, 명치(明治) 381117의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에 의하여 비로소 일본(日本)은 한국(韓國)의 외교사무(外交事務)를 감리지휘(監理指揮)함에 이르렀고 독도(獨島)의 영토편입(領土編入)의 시기(時期)에 있어서 만약 참으로 한국(韓國)이 독도(獨島)에 대하여 역사적(歷史的) 내지 행정적(行政的)으로 정당(正當)한 권한(權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본정부(日本政府)에 항의(抗議)하는 것은 방해(妨害)할 것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指摘)하고자 한다[각주:15]라고 단언(斷言)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日本)의 한국침략(韓國侵略)(侵略)을 합리화(合理化)하는 폭론(暴論)일 뿐만 아니라 역사상(歷史上)의 사실(事實)에도 완전히 반()한다[각주:16]. 명치(明治) 37(1904) 530일 원로회결정(元老會決定), 동월(同月) 31일 각의결정(閣議決定), 611일 천황결재(天皇決裁)대한시정강령(對韓施政綱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외교(外交)를 한국(韓國) 당로자(當路者)가 하는대로 일임(一任)한다면 암암리(暗暗裡)에 어떠한 위험(危險)한 사태(事態)의 성립(成立)을 볼지도 모른다. 따라서 적당(適當)한 최근(最近)의 기회(機會)에 한국정부(韓國政府)로 하여금 외국(外國)과의 조약체결(條約締結) 기타(其他)의 중요(重要)한 외교안건(外交案件)의 처리(處理)에 관하여는 미리 제국정부(帝國政府)의 동의(同意)를 요()한다는 뜻을 약속(約束)케 하도록 기()한다. 위의 기획수행(企劃遂行) ()이라 할지라도 다음 수단(手段)으로써 외교(外交)의 감독(監督)을 행()하라. ()(()).(), 외부아문(外部衙門)에 일인(一人)의 고문관(顧問官)을 두어 이면(裏面)에서 그 정무(政務)를 감독지휘(監督指揮)케 할 것. 그리고 그 고문(顧問)은 차라리 외국인(外國人)으로써 그 직무(職務)를 수행(遂行)케 하면 내외(內外)에 대하여 원활(圓滑)하게 아목적(我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용이(容易)할 것이다.[각주:17]

위와 같이 제일한일협약(第一韓日協約)에 있어서의 외국인(外國人) 외교고문(外交顧問)대한시정강령(對韓施政綱領)이 예정(豫定)했던 기능(機能)을 그대로 실행(實行)한 것 뿐이고 기타에 있어서도 이 협약(協約) 전체(全體)대한시정강령(對韓施政綱領)의 구체화(具體化)인 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일제침략(日帝侵略)을 미국인(美國人) Stevens가 책임(責任)을 져야 하고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는 책임(責任)이 없다는 것과 같은 일본정부(日本政府)의 논조(論調)는 이치(理致)에 맞지 않을뿐더러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또한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은 한국(韓國)의 전역(全域)을 대상(對象)으로 하였고 전체(全體) 한국영토(韓國領土)의 탈취(奪取)를 꾀하였던 것이다. 일본정부(日本政府)가 주장(主張)하는 바와 같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4조의 규정(規定)로일전쟁(露日戰爭)에서 한국(韓國)의 영토보존(領土保存)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하여 필요(必要)에 응()하여 군략상(軍略上) 필요(必要)한 지점(地點)을 일시적(一時的)으로 사용(使用)할 것을 약정(約定)한데 불과(不過)것이라는 논조(論調)와 그것이 독도(獨島)의 방영편입조치(邦領編入措置)와는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라는 방언(放言)은 지지(支持)되기 곤란(困難)하다. 일본정부(日本政府)일시적(一時的)이라는 말을 사용(使用)하였으나 실()은 영구적(永久的)이고 근본적(根本的)인 침략계획하(侵略計劃下)에 모든 일을 추진(推進)하였던 것이다[각주:18].

또한 일본정부(日本政府)독도(獨島)의 영토편입(領土編入)의 시기(時期)에 있어서 만약 참으로 한국(韓國)이 독도(獨島)에 대하여 역사적(歷史的) 내지 행정적(行政的)으로 정당(正當)한 권한(權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본정부(日本政府)에 항의(抗議)하는 것을 방해(妨害)할 것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指摘)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확실(確實)히 형식적(形式的)으로는 당시(當時) 한국(韓國)의 외무부(外務部)가 소멸(消滅)한 것은 아니었다. 외교관(外交官)이 각국(各國)에 주재(駐在)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외교(外交)의 근본(根本)과 중추(中樞)는 일본(日本)이 장악(掌握)하고 만 것이다. 일본(日本)이 대중국(對中國) 21개조와 같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한국(韓國)에 강요(强要)했을 때 국제법상(國際法上) 이미 한국(韓國)은 그 의정서(議定書)에 의하여 일본(日本)의 보호국(保護國)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當時) Cambridge대학(大學)의 국제법교수(國際法敎授) T.J.Lawrence“War and Neutrality of the Far East"에서 지적(指摘)한 바와 같다[각주:19]. Lawrence의 의견(意見)에 의하면 이 의정서(議定書) 1조의 대한제국정부(大韓帝國政府)는 대일본제국정부(大日本帝國政府)를 확신(確信)하고 시설(施設)의 개선(改善)에 관하여 그 충고(忠告)를 받아 들일 것이라고 한 충고(忠告)라고하는 것은 국제법상(國際法上)으로 말하면 명령(命令)과 같은 것이며, 이 규정(規定)에 의하여 한국(韓國)은 일본(日本)의 지배하(支配下)에 서며 사실상(事實上) 보호국(保護國)이 되었다고 한다. 4조의 한국내(韓國內)의 어떠한 토지(土地)도 일본(日本)군략상(軍略上) 필요(必要)한 지점(地點)을 임기수용(任機收用)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규정(規定)도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의 주권(主權)하에 예속(隸屬)된 것을 표시(表示)한다.

결론적(結論的)으로 말하면 한국(韓國)의 외교권(外交權) 따라서 주권(主權) 또는 독립(獨立)이 상실(喪失)된 것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締結)19051117일이 아니라 실()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조인(調印)1904223일이다. 따라서 일본(日本)의 독도편입(獨島編入)의 시기(時期)에 있어서 한국정부(韓國政府)일본정부(日本政府)에 항의(抗議)하는 것을 방해(妨害)할 것이 없었다고 하는 따위의 의논(議論)은 폭론(暴論)에 불과(不過)하며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Schwarenberger의 말과 같이 침묵(沈黙)(silence)일 묵인(黙認)(acquiesence)으로 해석(解釋)되느냐의 여부는 각각(各各)의 사건(事件)에 따라 다르다[각주:20]. 일본측(日本側)1905년의 이른바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의 시기(時期)에 있어서 한국정부(韓國政府)로부터 어떠한 항의(抗議)나 반대의사(反對意思)의 표명(表明)도 없었다는 사실(事實)을 들어 그 침묵(沈黙)이 마치 일본(日本)의 조치(措置)에 대한 묵인(黙認)을 형성(形成)한 것처럼 논()하고 있으나 독도(獨島)는 고사(姑捨)하고 한반도(韓半島) 전체(全體)를 식민지화(植民地化)하는 과정(過程)에서 이루어진 그 일본(日本)의 행위(行爲)가 한낱 항의(抗議)의 의사표시(意思表示)가 없었다는 이유(理由)만으로 합법화(合法化)될 수는 없는 없으며 또 그러한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시기(時期)에 있어서 일본(日本)의 침략(侵略) 앞에 무력(無力)한 당시(當時)의 한국정부(韓國政府)로부터 항의(抗議)의 의사표시(意思表示)의 가능성(可能性)을 추론(推論)한다는 것은 합리적(合理的)인 법적(法的) 고려(考慮)를 초월(超越)하는 것이다. 항의(抗議)의 의사표시(意思表示)를 언제까지 해야 된다는 실정국제법상(實定國際法上)의 시간적(時間的) 제한(制限)은 확립(確立)되지 않았다. 구체적(具體的) 사정(事情)에 따라 결정(決定)될 문제(問題)라고 생각한다. 종전후(終戰後) 주권(主權)을 회복(回復)한 한국정부(韓國政府)가 특()1952년 이래(以來) 독도(獨島)에 대하여 취()해 온 모든 주권적(主權的) 행위(行爲) 및 일련(一連)의 조치(措置)는 일본(日本)의 과거의 편입조치(編入措置)에 대한 구체적 항의(抗議)의 표현(表現)이라고 이해(理解)되는 것이다.

사정(事情)은 이 이상(以上)의 설명(說明)을 요()하지 않을 정도(程度)로 명료(明瞭)하다. 설사(設使) 독도(獨島)의 일본령(日本領)에의 편입(編入)이 바로 한국령(韓國領)의 탈취(奪取)였는지는 더욱 검토(檢討)의 여지(餘地)가 있다 하더라도 그 편입(編入)의 시기(時期)가 일본(日本) 외무성(外務省)의 말과는 달라 한국(韓國)에의 침략(侵略)program대로 진행(進行)되어 이미 실질적(實質的)으로 한국(韓國)의 주권(主權)을 박탈(剝奪)하고 외교권(外交權)을 탈취(奪取)했던 시기(時期)이며 이러한 시기(時期)편입(編入)이 단행(斷行)된 것은 명백(明白)한 사실(事實)이다. 이와 같이 독도(獨島)가 시기적(時期的)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로일전쟁(露日戰爭) 및 그 전후(前後) 일본(日本)이 한국(韓國)을 침략(侵略)하고 식민지화(植民地化)하는 과정(過程)에서 편입(編入)되었다는 사실(事實)은 그것이 cairo선언(宣言)에 이른바 폭력(暴力) 및 강요(强要)에 의하여 약취(略取)된 기타(其他)의 모든 지역(地域)의 하나에 해당(該當)된다는 추정(推定)을 받게 되며, 따라서 일본(日本)은 이러한 지역(地域)으로부터 구축(驅逐)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일본(日本)이 그와 같은 추정(推定)을 부인(否認)할 생각이라면 독도(獨島)편입(編入)은 침략(侵略)이 아니라는 입증책임(立證責任)(burden of proof)을 스스로 다 하여야 한다.

 

(()) 독도(獨島)는 선점(先占)될 수 있는가

 

독도(獨島)사 일본(日本)고유(固有)의 영토(領土)라는 일본측(日本側)의 주장(主張)은 근거(根據)가 없으며, 따라서 이른바 도근현(島根縣) 고시(告示)일본(日本)이 근대국가(近代國家)로서 독도(獨島)를 영유(領有)할 의사(意思)를 재확인(再確認)하여 이것을 일본(日本)의 근대행정구분중(近代行政區分中)에 편입(編入)하고[각주:21] 이것을 고시(告示)한 것이라는 주장(主張)[각주:22]()히 괴로운 변명(辨明)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고유(固有)의 영토(領土)에 대()한 영유의사(領有意思)의 재확인(確認)이란 자기모순(自己矛盾)이며 근대국가(近代國家)가 되었다고 하여 이러한 모순(矛盾)을 범해야 한다는 이유(理由)도 없이 때문이다.

이리하여 일본(日本)의 학자중(學者中)에는 독도(獨島)에 대한 고유영토설(固有領土設)을 포기(抛棄)하고 1905년의 편입(編入)조치(措置)를 국제법상(國際法上)선점(先占)법리(法理)로써 설명(說明)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각주:23]. 이러한 의논(議論)이야말로 더욱 더욱 문제의 해결(解決)을 미로(迷路)에 몰아 넣는 것이며, 최상(最上)의 경우에 있어서도 국제법(國際法)의 범위내(範圍內)에서의 강도행위(强盜行爲)를 자행(恣行)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선점(先占)이라고 하는 것은 영역취득(領域取得)의 일방식(一方式)으로서 전통적(傳統的)서구적(西歐的) 국제법(國際法)이 지금까지 일반적(一般的)으로 인정(認定)해온 방식(方式)이다. 그러나 지금 AA 신흥제국(新興諸國)에 의하여 바야흐로 공격(攻擊)의 목표(目標)가 되고 있는 것은 정복(征服)과 아울러 바로 이 선점(先占)에 의한 영토취득(領土取得)이며, 식민지(植民地)로부터 독립(獨立)한 제국(諸國)이 식민지지배(植民地支配)를 합리화(合理化)하고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이러한 법규(法規)의 타당성(妥當性)을 문제시(問題視)하는 것은 당연(當然)한 현상(現象)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24]. 지금 일본(日本)은 이와 같은 선점(先占)법리(法理)로써 독도편입(獨島編入)을 합법화(合法化)하려는 심산(心算)이다.

국제법상(國際法上) 영역취득(領域取得)의 권원(權原)으로 인정(認定)된 선점(先占)의 원칙(原則)Roma법상(法上)의 무주물선점(無主物先占)analogy를 국제법(國際法)에 도입(導入)한 것에 불과(不過)하다. 즉 근세초두(近世初頭)의 초기식민지시대(初期植民地時代)Spain, Protugal에 의하여 주장(主張)되었던 발견우선(發見優先)의 원칙(原則)을 배제(排除)하고 서구제국(西歐帝國)의 식민지획득경쟁(植民地獲得競爭)power politics의 현실(現實)에 보다 근접(近接)rule에 올려놓기 위하여 국내사법상(國內私法上)의 무주물선점(無主物先占)의 법리(法理)를 유추(類推)한 것이며, 전적(全的)으로 서구제국(西歐帝國)의 비() Europe세계(世界)에 대한 식민지(植民地) 획득(獲得)을 위한 법리(法理)로서 제도화(制度化)된 것이다[각주:25]. 그런데 Roma()이나 근대민법(近代民法)에 있어서의 소유권(所有權)의 원시취득(原始取得)의 방법(方法)인 사적(私的) 선점(先占)과 영역권취득(領域權取得)의 방법(方法)인 국제적(國際的) 선점(先占)과의 사이에는 중대(重大)한 차이(差異)가 있으니, 그것은 후자(後者)인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선점(先占)이 무인도(無人島)나 무인(無人)의 육지(陸地) 뿐만 아니라 사람이 현재(現在) 살고 있고 또는 점유(占有)하고 있는 지역(地域)에 대해서도 이것을 원시취득(原始取得)할 수 있는 권원(權原)으로 인정(認定)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Europe()의 다수(多數)의 지역(地域)은 비록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고 일정(一定)한 사회생활(社會生活)을 영위(營爲)하고 있을지라도 무주(無主)의 토지(土地)(terra nulius)로 보아[각주:26] 서구제국(西歐帝國)의 실효적(實效的) 지배(支配)에 의한 선점(先占)의 대상(對象)이 되고 말았으니 Asia Arfica의 식민지(植民地)의 대부분(大部分)은 그러한 과정(過程)에서 형성(形成)된 것이었다. 근대국제법(近代國際法)은 이와같이 그 발생(發生)의 최초(最初)부터 깊이 근대식민지주의(近代植民地主義)와 밀착(密着)되어 있다[각주:27]. 2차대전(2次大戰) 후의 비식민지화(非植民地化)(decolonization)운동(運動)은 서구제국주의(西歐帝國主義)에 대한 식민지원주민(植民地原住民)의 반격(反擊)이며, 전통적(傳統的) 선점법리(先占法理)의 타당성(妥當性)을 의문시(疑問視)하고 이에 도전(挑戰)하는 것은 당연(當然)한 현상(現象)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28]. 20세기(世紀)에 들어와서 식민지(植民地)의 분할(分割)을 완료(完了)되고 선점(先占)의 원칙(原則)은 이미 그 역사적(歷史的) 기능(機能)을 다했다고 생각된다. 일본(日本)은 이러한 선점(先占)의 법리(法理)로써 독도(獨島)의 취득(取得)을 합법화(合法化)하려는 것이니 독도(獨島)에 관()한 한() 이 원칙(原則)의 적용대상(適用對象)과 방법론(方法論)을 그릇 파악(把握)한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일본(日本)의 독도(獨島) 취득(取得)에 선점법리(先占法理)를 적용(適用)할 수 있다고 가정(假定)하자. 그렇다면 일본(日本)은 마땅히 독도(獨島)가 무엇보다도 무주지(無主地)인 것을 증명(證明)해야 한다. 그러나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독도(獨島)는 옛날부터 한국(韓國)의 영토(領土)였으며 이것을 한국(韓國) 및 국민(國民)은 울릉도(鬱陵島)와 동일(同一)한 한국영토(韓國領土)로 생각(生覺)해 온 것이 틀림없는 사실(事實)이다. 상술(上述)한 역사적(歷史的) 경위(經緯)로 보아 일본(日本)은 독도(獨島)소유불명(所有不明)의 토지(土地)로 보고 선점(先占)한 것이고 무주지(無主地)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속(所屬)이 명확(明確)치 않다는 것과 무주지(無主地)와는 엄연(嚴然)히 다르다. 이 양자(兩者)의 혼동(混同)은 마치 1905년으로부터 1918년까지에 완료(完了)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에 의()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광대(廣大)소유불명(所有不明)의 토지(土地)를 몰수(沒收)하였으나 이것은 절대(絶對)로 무주지(無主地)가 아니었던 것과 유사(類似)한 점()이 있다. 한국(韓國)이 독도(獨島)에 대하여 어느 정도(程度)의 권원(權原)을 갖고 있는 이상(以上) 독도(獨島)를 무주지(無主地)라고 생각(生覺)할 수 있을 것인가. 독도(獨島)와 같은 무인소도(無人小島)에 요구(要求)되는 완성(完成)된 권원(權原)이란 1905년 이전(以前)의 한국측(韓國側) 사실(事實)로써 족()하다고 생각된다. 1905년 독도(獨島)편입(編入)에 의하여 일본(日本)의 원시적(原始的) 권원(權原)은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effective possession)라고 하는 실정국제법상(實定國際法上)의 권원(權原)에 대체(代替)되었다고 한다[각주:29]. 그러한 일본측(日本側)의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가 어떠한 실체(實體)를 가진 것인지 명확(明確)치 않으나 한국정부(韓國政府)는 이보다 앞서 이미 1900년에 울릉군수(鬱陵郡守)가 석도(石島)(독도(獨島))를 관할(管轄)한다는 칙령(勅令)을 공포(公布)한 바 있는 것이다. 즉 광무(光武) 4(1900) 1025일 칙령(勅令) 41호에 의하면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라 개칭(改稱)하여 강원도(江原道)에 부속(附屬)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칭(改稱)할 것(1)과 울릉군수(鬱陵郡守)의 관할구역(管轄區域)을 죽도(竹島)와 석도(石島)(독도(獨島))로 한다(2)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정부(韓國政府)의 독도(獨島)에 대한 부인(否認)할 수 없는 국가기능(國家機能)의 발현(發現)이고 그곳에 표명(表明)된 것은 의심(疑心)의 여지(餘地)없는 한국(韓國)의 국가의사(國家意思)이며 독도(獨島)가 한국(韓國)의 주권하(主權下)에 있었다는 유력(有力)한 증거(證據)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日本)이 독도(獨島)를 취득(取得)했다는 1905()보다 5년이나 앞선 1900년에 이미 한국(韓國)은 독도(獨島)에 대하여 보유(保有)하고 있던 원시적(原始的) 권원(權原)을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라는 실정국제법(實定國際法)이 요구(要求)하는 근대적(近代的) 권원(權原)으로 대체(代替)했던 것이다[각주:30]. 이와 같이 독도(獨島)는 명백(明白)한 한국(韓國)의 영토(領土)이며 무주지(無主地)는 아니었다. 따라서 독도(獨島)는 일본(日本)에 의한 선점(先占)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는 땅이다. 그러므로 의심(疑心)할 수 없는 한국영토(韓國領土)의 일부(一部)인 독도(獨島)를 무주지(無主地)라는 전제하(前提下)영토(領土)를 취득(取得)하려는 국가의사(國家意思)를 가지고 선점(先占)했다는 것은 선점요건(先占要件)의 충족(充足)이 아니라 제국주의(帝國主義) 일본(日本)의 침략정책(侵略政策)의 일표현(一表現)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한국정부(韓國政府)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국가의사(國家意思)의 공적(公的) 발표(發表)라는 선점(先占)의 요건(要件)을 충족(充足)시켰다는 일본정부(日本政府)의 논의(論議)를 부인(否認)한다. 일본정부(日本政府)는 말한다.

현대국제법하(現代國際法下)의 영토취득(領土取得)의 요건(要件)에 관하여는 영토(領土)를 획득(獲得)하려는 국가(國家)의 의사(意思)가 독도(獨島)를 일본(日本)의 영토(領土)에 가()하기로 1905128일자 내각회의(內閣會議)에서 결정(決定)을 본 경우로서 확정(確定)되었고, 1905222일 영토(領土)를 획득(獲得)하려는 국가의사(國家意思)의 공적(公的) 발표(發表)를 도근현청(島根縣聽)에 공포(公布)한 고시(告示)로서 하였다. 이것은 당시(當時) 일본(日本)이 선점(先占)의 경우에 관행(慣行)한 고시방법(告示方法)에 의한 것이며, 국가의사(國家意思)의 공적(公的) 발표(發表)로서 취()하여진 상기(上記) 방법(方法)은 이 관계(關係)의 국제법상(國際法上)의 고시요건(告示要件)을 만족(滿足)시키고 있다[각주:31]

이에 대하여 한국정부(韓國政府)는 답()한다.

도근현청(島根縣聽)의 고시(告示)라 하는 것은 암암리(暗暗裡)에 시행(施行)된 것으로서 외국(外國)에는 물론(勿論) 일본(日本)의 일반국민(一般國民)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를 결코 일국가(一國家)의 의사(意思)의 공표(公表)라고 간주(看做)할 수는 없다.[각주:32]

확실(確實)각의결정(閣議決定)은 국가의사(國家意思)는 된다. 그러나 그것은 국내문제(國內問題)이고 정부기관(政府機關)에 의한 대외적(對外的) 공표(公表)가 정식(正式)으로 없는 한() 영토취득(領土取得)의 요건(要件)으로서는 불충분(不充分)하다. 또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로써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요건(要件)을 만족(滿足)시켰다고 하나 그것은 일지방자치체(一地方自治體)의 공표(公表)이며, 그 자치체(自治體)의 결정(決定)을 그 지방민(地方民)에게 알리는 것으로 결코 국가(國家)의 대외적(對外的) 의사표시(意思表示)가 아니다. 만약(萬若) 일자치체(一自治體)의 결정(決定)을 그 지방민(地方民)에게 알리는 고시(告示)를 국가(國家)의 대외적(對外的) 의사표시(意思表示)라고 한다면 새삼스럽게 국제법(國際法)이나 국제법학자(國際法學者)의 학설(學說)을 원용(援用)할 필요(必要)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국제문제(國際問題)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법(地方自治法)(국내법(國內法))을 적용(適用)하여 해결(解決)하면 족()하기 때문이다.[각주:33]

이와같이 대외적(對外的) 통고(通告)(notification)가 선점(先占)의 요건(要件)이 되느냐의 문제(問題)는 한일양국간(韓日兩國間)에 심각(深刻)한 논쟁(論爭)의 제목(題目)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판례(判例) 및 학설상(學說上)으로도 논의(論議)가 분분(紛紛)하다. 또 다시 일본정부(日本政府)는 통고(通告)를 영토취득(領土取得)의 절대적(絶對的) 요건(要件)으로 하는 국제법(國際法)의 원칙(原則)은 현재(現在)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1928년의 Palmas도사건(島事件) 1931년의 Clipperton도사건(島事件)의 중재재판(仲裁裁判)에 있어서도 외국(外國)에 대한 통고(通告)는 필요(必要)없다는 뜻의 판결(判決)이 있었으며, 미국의 Guann()의 선점(先占)에 관해서도 외국(外國)에의 통고(通告)는 행()하지 않는 것을 예로 하고 있다[각주:34]는 주장(主張)을 내세운다. 그러나 Clipperton사건(事件) 에서는 엄연(嚴然)Hawaii정부(政府)에 대한 통고(通告)가 있었고 Hawaii에서 발행(發行)되는 Polynesia지상(紙上)에 영문(英文)으로 Clipperton()에 대한 France의 주권(主權)의 수립(樹立)을 공고(公告)하였던 것이다[각주:35]. 1928년의 Palmas() 사건(事件)에 대한 중재재판(仲裁裁判)에서 있어서는 외국(外國)에 대한 통고(通告)가 기타(其他)의 공식(公式)적인 행위(行爲)와 동양(同樣)으로 palmas()에 대한 Holland의 행위(行爲)를 정당화(正當化)하는 조건(條件)이 되는 것을 확정(確定)하고 있으며 절대(絶對)로 통고(通告)가 어떠한 경우에도 필요(必要)없다는 의미(意味)는 아니었다. 다만 Palmas()와 같은 주민(住民)이 살고 있는 지역(地域)에서는 은밀(隱密)한 주권행사(主權行使)란 불가능(不可能)하다는 전제하(前提下)Africa대륙(大陸)의 선점(先占)에서 보는 바와 같은 통고(通告)의 의무(義務)가 발생(發生)하지 않는다고 판정(判定)하였을 뿐이다[각주:36]. 또 일본측(日本側)Guana()의 선점(先占)에 관하여 예시(例示)하고 있는 1890년의 미국대륙법(美國大陸法)의 판결(判決)에서 보더라도 문제(問題)의 섬이 명백(明白)히 무주(無主)의 지역(地域)이라는 확증(確證)이 선 연후(然後)에 비로서 그 섬의 미국(美國)에서의 편입(編入)을 결정(決定)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 때문에 외국(外國)에의 통고(通告)를 행()하지 않았던 것이고 또 이 사건(事件)을 순전(純全)히 국내적(國內的) 사건(事件)으로서 외국(外國)과의 분쟁(紛爭)이 야기(惹起)된 일은 없었다[각주:37].

학설상(學說上) Oppenheim에 의하면 타국(他國)에 대한 선점(先占)의 통고(通告)를 그 효력(效力)의 필요(必要)한 조건(條件)으로 하는 국제법규(國際法規)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Africa연안(沿岸)에 대한 장차(將次)의 선점(先占)에 관해서는 1885년의 Berlin회의(會議)의 일반의정서(一般議定書) 당사국(當事國)들이 선점(先占)을 상호간(相互間)에 통고(通告)할 의무(義務)를 지고 있으나 이 의정서(議定書)1910910일의 St. Germain협정(協定)의 당사국(當事國)에 관한 한() 폐지(廢址)되었다[각주:38]고 한다. Guggenheim도 국제법상(國際法上) 일반적(一般的)으로 조약상(條約上) 특별(特別)의 의무(義務)를 부담(負擔)하는 경우를 제외(除外)하고는 영토(領土)의 취득(取得)을 타국(他國)에 대하여 통고(通告)할 의무(義務)는 없다고 한다[각주:39].

Jennings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승인(承認)(recognition)이나 묵인(黙認)은 물론(勿論)이고 공시(publicity)까지도 선점(先占)에 의한 권원(權原)에 대하여 엄격(嚴格)한 관련(關聯)이 없다고 결론(結論)한다[각주:40]. 그러나 WestlakeLord Stowell을 인용(引用)하면서 선점(先占)의 공시(公示)는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요건(要件)이라고 한다[각주:41]. 그러므로 설사(設使) 통고(通告)의 의무(義務)가 조약상(條約上)의 의무(義務)로서 존재하지 않더라도 관습국제법상(慣習國際法上)의 규칙(規則)으로서 국제사회(國際社會)의 법적안전(法的安全)의 필요성(必要性)에 의()하여 그것은 일반적(一般的)으로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된다[각주:42]. 선점(先占)을 통고(通告)하여 이로써 필요(必要)한 경우에는 타국(他國)이 이의(異議)를 제출(提出)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각주:43]는 것은 비단 어느 특정(特定) 조약당사자(條約當事者)에게만 지워질 의무(義務)가 아니다. 은밀(隱密)한 선점(先占) 또는 불법적(不法的)인 선점(先占)(선점(先占)이라는 구실하(口實下)에 행해지는 침략(侵略))을 방지(防止)하기 위한 국제사회(國際社會)의 일반적(一般的) 요청(要請)에 부합(符合)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Schwarzenberger가 통고(通告)의 의무(義務)를 그것이 St. Germain조약(條約)의 규정(規定)으로부터 제외(除外)된 결과(結果) 관습국제법상(慣習國際法上)의 규칙(規則)으로서의 지위(地位)를 회복(回復)하였다[각주:44]고 갈파(喝破)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의미(意味)에서 정당(正當)한 견해(見解)라고 보아야 한다. 1888년의 국제법학회(國際法學會)(Institute of International Law)에 의()한 선언(宣言)도 점유(占有)에 관한 공적(公的) 통고(通告)를 선점(先占)의 요건(要件)으로 본 것이며, 이러한 통고(通告)공적(公的) 행위(行爲)의 통고(通告)를 위하여 각국(各國)이 관습적(慣習的)으로 채용(採用)한 형식(形式)의 공시(公示)에 의하여 행()할 수도 있고, 외교적(外交的) 통고(通告)를 통하여 행()할 수도 있는 것으로 하였다[각주:45]. 이로써 볼 때 일본(日本)의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라고 하는 것이 과연(果然) 이와 같은 통고(通告) 또는 공시(公示)의 효력(效力)을 가진 것인지 의문(疑問)시되는 것이다.

끝으로 일본(日本)은 선점(先占)의 제삼(第三)의 요건(要件)으로서 영토(領土)를 지배(支配)하는 적당(適當)한 세력(勢力)의 수립(樹立)을 들고 그 증거(證據)로서 일본정부(日本政府)가 독도(獨島)에 대하여 현지측량(現地測量)을 했다는 것과 독도수역(獨島水域)의 해려어업(海驢漁業)에 허가제(許可制)를 채용(採用)하였다는 것을 든다[각주:46]. 그러나 일본제국(日本帝國)은 특히 1904년 이래 한국(韓國) 전토(全土)의 강제점령(强制占領)을 목적(目的)으로 측량(測量) 기타의 명목하(名目下)에 공공연(公公然)히 한국침략(韓國侵略)을 기획(企劃)한 사실(事實)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다. 그러한 시기(時期)에 행()해진 일본(日本)의 독도(獨島)에 대한 행위(行爲)는 침략행위(侵略行爲)라는 추정(推定)을 받게 되면 국제법상(國際法上)영토지배권(領土支配權)의 계속적(繼續的) 행사(行使)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결론적(結論的)으로 말해서 독도(獨島)를 선점(先占)했다는 일본측(日本側)의 주장(主張)은 요건(要件)을 충족(充足)하지 못한 까닭에 지지(支持)될 수 없는 것이다.

 

(()) 독도문제(獨島問題)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은 적용(適用)되는가.

 

일반적(一般的)으로 국제분쟁(國際紛爭)을 법적(法的)으로 해결(解決)하기 위한 실정국제법(實定國際法)의 기준(基準)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effective possession)라는 원칙(原則)이다. 이 원칙(原則)은 학설(學說)과 판례(判例)에 의하여 지지(支持)를 받고 있으며 영토취득(領土取得)에 관한 거의 만능(萬能)(erga omnes)의 권원(權原)으로 인정(認定)되고 있는 것 같다.

미국(美國)Holland간의 Palmas() 사건(事件)(1928)에서 단독판사(單獨判事)Max HuberPalmas()에 대한 Hollan의 주권행사(主權行使)라는 사실(事實)을 결정적(決定的)으로 높이 평가(評價)하여 그 섬에 대한 영역권(領域權)Holland에 있다고 판정(判定)하였다. 즉 미국(美國)Palmas()에 대한 영토권(領土權)의 주장(主張), Spain-U.S.전쟁(戰爭)을 종결(終結)시킨 18981210일의 조약(條約)에 의하여 Spain이 행()한 할양(割讓)에 근거(根據)하였다. 그러므로 Huber판사(判事)가 판정(判定)해야 할 문제(問題)는 할양(割讓)시에 SpainPalmas()에 주권(主權)을 갖고 있었느냐의 여부(與否)였다. Holland1898년 및 그 이전(以前)에 오랫동안 그 섬에서 평화적(平和的)으로 주권(主權)을 행사(行使)하였다고 주장(主張)하고, Huber판사(判事)Holland1700년 이래 그 섬에서 그렇게 주권(主權)을 행사(行使)하고 있었다는 증거(證據)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각주:47].

Palmas() 사건(事件)에서 Huber판사(判事)16세기(世紀)의 전반(前半) SpainPalmas()를 발견(發見)했다고 주장(主張)하였던 당시(當時) 이러한 발견(發見), 즉 점유행위(占有行爲)는 상징적(象徵的)인 것조차 없고, 단순(單純)히 섬을 발견(發見)한데 불과(不過)한 사실(事實)은 상당기간내(相當其間內)에 행()해진 현실적(現實的) 및 지속적(持續的)인 점유(占有)에 의하여 최종적(最終的)으로 완성(完成)되는 대물권(對物權)(a jus ad rem)<미완성(未完成) 권원(權原)>(inchoate title)이 아니라 <법률상(法律上) 당연(當然)>(ipso jure)의 영토주권(領土主權)을 포함(包含)한다.는 것을 인정(認定)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1898년에 Spain이 여전(如前)히 주권자(主權者)였던가의 문제(問題)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Huber판사(判事)는 설사(設使) 단순(單純)한 발견(發見)이 전()에 권원(權原)을 수반(隨伴)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19세기(世紀)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자기(自己)의 견해(見解)를 표명(表明)하였다. 19세기(世紀)에 이르기까지에는 선점(先占)은 실효적(實效的)이어야 한다는 원칙(原則)이 국제법상(國際法上) 수립(樹立)되었었다. 이로부터 Huber판사(判事)는 일단 취득(取得)한 주권(主權)은 여하튼 19세기 이후(以後)에는 실효적(實效的)인 행사(行使)에 의해서만 보유(保有)할 수 있다고 추론(推論)한 것이다. 다수(多數)의 학설(學說)과 관례(慣例)는 타국(他國)이 그 영역(領域)에서 주권적(主權的) 행위(行爲)를 하지 않았다는 조건하(條件下)에 대외적(對外的) 표시(表示)없이 주권(主權)을 보유(保有)할 수 있는 것을 인정(認定)하고 있다[각주:48]. 이리하여 Huber판사(判事)는 이 사건(事件)을 미완성(未完成) 권원(權原)의 사건(事件)으로 취급(取扱)하여 Palmas()를 무주물(無主物)로 보고 Holland는 선점(先占)에 의하여 이것을 취득(取得)할 수 있다고 판단(判斷)한 것이다.

요컨대 Holland의 그러한 주권행사(主權行使)가 있기 전에 Spain이 그 섬을 발견(發見)또는 선점(先占)했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以後)에 주권행사(主權行使)와 현실적(現實的) 지배(支配)가 계속(繼續)하지 않았기 때문에 Spain은 그 섬에 대한 영역권(領域權)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권(主權)의 현실적(現實的) 행사(行使)가 뒤따르지 않는 추상적(抽象的) 권한(權限)은 타국(他國)에 의한 주권(主權)의 현실적(現實的) 행사(行使)에 대항(對抗)할 수 없다는 것이 Palmas() 사건(事件)의 교훈(敎訓)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영토취득(領土取得)에 있어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을 선언(宣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권(主權)의 실제적(實際的) 행사(行使) 내지는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은 전술(前述)1885년의 Berlin회의에서 채택(採擇)Congo의정서(議定書)에도 천명(闡明)되었다. 즉 동() 의정서(議定書)의 제35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規定)하고 있다.

() 의정서(議定書)의 조인국(調印國)Africa대륙(大陸)의 해안상(海岸上)의 선점(先占)된 지방(地方)에서 기득권(旣得權)을 보호(保護)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약정(約定)된 조건(條件)에 의하여 통상(通商) 및 통과(通過)의 자유(自由)를 보호(保護)하기에 족()한 권력(權力)의 존재(存在)를 보장(堡障)할 의무(義務)를 인정(認定)한다.

더 나아가서 1933Norway Denmark()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PCIJ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라는 용어(用語)는 쓰지 않았으나 권원(權原)의 계속적(繼續的) 표시(表示)로부터 파생(派生)되는 권원(權原)에 언급(言及)하면서 이러한 권원(權原)의 존재(存在)를 증명(證明)하는 요건(要件)으로서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주권자(主權者)로서 행동(行動)하려는 목적(目的)과 의사(意思)(animus occupandi) 이러한 권위(權威)의 실제적(實際的) 행사(行使)나 표시(表示)(corpus occupandi)[각주:49]. 첫째의 요건(要件)은 영토(領土)의 주권자(主權者)임을 주장(主張)한 적극적(積極的)인 증거(證據), 예하면 공표(公表)된 권원(權原)의 주장(主張)이나 주권적(主權的) 행동(行動)이 존재(存在)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의 요건(要件)은 주권(主權)의 충분(充分)한 행사(行使)나 표시(表示)가 존재(存在)해야 한다는 규칙(規則)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원(權原)의 표시(表示)를 구성(構成)하기 위하여 취()해진 그 실제적(實際的) 행사(行使)(실효적(實效的) 지배(支配))와 지리적(地理的) 상황(狀況)과의 관계(關係)에 대해서는 PCIJ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토주권(領土主權) 관계(關係)의 사건기록(事件記錄)을 읽어 보면 다수(多數)의 사건(事件)에서 재판소(裁判所)는 타국(他國)이 한층 우위(優位)의 주권(主權)을 행()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除外)하고 주권적(主權的) 권리(權利)를 실제(實際)로 행사(行使)하는 방법(方法)에는 거의 만족(滿足)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인구(人口)가 희박(稀薄)한 식민(植民)되지 않은 지역(地域)에 대한 주권(主權)의 주장(主張)의 경우 특히 사실(事實)이다.

재판소(裁判所)가 도달(到達)한 결론(結論)은 다음과 같다. 즉 타국(他國)에 의한 어떠한 주권(主權)에 대한 주장(主張)도 없는, 또 북극(北極)이나 그 국가(國家)의 식민(植民)되지 않은 부분(部分)에의 도달곤란(到達困難)한 성질(性質)을 염두(念頭)에 둔다면 DenamarkNorwary의 왕국(王國)1721년의 Hans Egede에 의한 식민지(植民地)의 건설(建設)로부터 1814년까지의 기간(其間) ()(NorwayDenmark Sweden과의 연합(聯合)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일자) 주권(主權)에 대한 유효(有效)한 주장(主張)을 자국(自國)에 부여(賦與)하기에 충분(充分)한 정도(程度)까지 그 권한(權限)을 표시(表示)하였으며 또 Greenland에 대한 왕국(王國)의 권리(權利)는 식민지역(植民地域)에만 한정(限定)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각주:50]

위와 같이 실효적(實效的)인 권력(權力)이 금일(今日)의 규준(規準)인 것은 PCIJ에 의한 The Eastern Greenland case의 판결(判決)에서도 증명(證明)되고 있으나, 타면(他面)에 있어서 동() 판결(判決)북극(北極) 및 접근(接近)하기 어려운 지역(地域)에서 그렇게 원격지(遠隔地)가 아닌 지역(地域)에서는 부적당(不適當)하다고 보여지는 것 같은 지배행위(支配行爲)를 현재(現在)에는 실효적(實效的)인 것으로서 아마 수락(受諾)하려는 의사(意思)를 표시(表示)하고 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 또는 지배(支配)의 내용(內容)은 일정(一定)한 선험적(先驗的)인 것으로 불변적(不變的)인 것이 아니라 지역적(地域的) 상황(狀況)에 따라 가변적(可變的)인 것임을 용이(容易)하게 파악(把握)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시 1931128FranceMexico간의 Clipperton Island case를 검토(檢討)해 보자. 이 사건(事件)중에서도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은 확인(確認)되었고 이 원칙(原則)은 다음과 같이 증명(證明)되고 있다.

()의 효력(效力)을 가진 세월불가상(歲月不可想)의 관행(慣行)에 의하면 점령(占領)의 의사(意思)(animus occupandi) 이외(以外)에 명목상(名目上)의 것이 아닌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corpus occupandi)가 선점(先占)의 필요(必要)한 조건(條件)임은 의문(疑問)의 여지(餘地)가 없다[각주:51].

2차대전(第二次大戰) 이후(以後) ICJ가 내린 판결(判決)중에서는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가 이와같은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에 입각(立脚)한 가장 두드러진 사건(事件)이다. 이 사건(事件)에서 ICJ는 영역권(領域權)의 확정(確定)을 위해서는 주권(主權)의 실효적(實效的) 행사(行使)가 필요(必要)함을 강조(强調)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권(主權)의 실효적(實效的) 행사(行使)에 있어서 결정적(決定的) 중요성(重要性)을 가지는 것을 중세기(中世紀)의 사건(事件)에서 도출(導出)되는 간접추정(間接推定)이 아니라 EcrehosMinquiers의 소군도(小群島)의 점유(占有)에 직접관계(直接關係)되는 증거(證據)이다[각주:52]라고 한다. 이른바 역사적(歷史的) 권원(權原) 또는 원시적(原始的) 권원(權原)이라고 하는 것도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나 지배(支配)를 수반(隨伴)하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法的) 효과(效果)도 낳지 못한다고 하면서 대체당시(代替當時)의 법()에 따라 타()의 유효(有效)한 권원(權原), 즉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로 대체(代替)되었을 때 비로소 법적(法的) 효과(效果)를 가진다는 것이다. Channel Islands에 관한 France()이 주장(主張)하는 바 원시적(原始的) 권원(權原)은 대체당시(代替當時)의 법()에 따라 각기 다른 유효(有效)한 권원(權原)으로 대체(代替)되어 있지 않으면 금일(今日)에는 어떠한 법적(法的) 효과(效果)도 산출(産出)하지 못한다.그리고 그와 같은 대체(代替)를 입증(立證)하는 책임(責任)France정부(政府)에 있다[각주:53]

동양(東洋)에 있어서 영토분쟁(領土紛爭)에 관한 유일(唯一)ICJ의 판결(判決)ThailandCambodia()The Prech Vihear case(The Temple case)에서도 법률적(法律的) 결정적(決定的)인 것을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사자(當事者)는 또한 지리적(地理的), 역사적(歷史的), 종교적(宗敎的) 및 고고학적(考古學的) 성질(性質)의 논거(論據)도 채용(採用)하였다. 그러나 재판소(裁判所)는 그것들을 법률적(法律的), 결정적(決定的)인 것으로 볼 수 없다.[각주:54] 그리고 또한 상기(上記) The Clipperton case에서도 Mexico의 역사적(歷史的) 권리(權利)에 관한 증거(證據)는 하등(下等) 이 섬에 대한 주권(主權)의 발현(發現)에 의하여 지지(支持)되지 않고 있다[각주:55]라고 말함으로써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중요성(重要性)을 표명(表明)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발견(發見)(discovery)에서 발생(發生)하는 권원(權原)도 주권(主權)의 발현(發現)에 기초(基礎)를 둔 권원(權原)에 우선(優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원칙(原則)을 처음으로 표명(表明)The Palmas cas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발견(發見)의 권원(權原)은 가장 유리(有利), 또 가장 확장(擴張)된 해석하(解釋下)에서도 미완성(未完成) 권원(權原)(inchoate title)으로서 존재(存在)할 뿐이다. 이 미완성(未完成) 권원(權原)은 계속적(繼續的) 및 평온(平穩)한 주권(主權)의 발현(發現)에 기초(基礎)를 둔 확정적(確定的) 권원(權原)에 우선(優先)할 수 없다.[각주:56]

위와 같이 영토분쟁(領土紛爭)의 해결(解決)에 있어서 결정적(決定的) 요소(要素)가 되는 것은 단순(單純)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나 발견(發見)이 아니라 주권(主權)의 발현(發現)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大部分)의 학설(學說) 및 국제판례(國際判例)에 일관(一貫)된 사상(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간(韓日間)의 독도문제(獨島問題)에 있어서도 대다수(大多數)의 일본학자(日本學者) 및 일본정부(日本政府)가 법률적(法律的)결정적(決定的) 의미(意味)를 가지는 것으로서 1905년의 이른바 독도(獨島)의 도근현(島根縣)에서의 편입(編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고방식(思考方式)에 연유(淵由)한다. 그러나 과연(果然) 일본(日本)에 의한 독도(獨島)편입(編入)이 위와 같은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로 인정(認定)될 수 있느냐의 문제(問題)는 일본측(日本側)의 주장(主張)을 떠나서 객관적(客觀的)으로 검토(檢討)되어야 할 문제(問題)이다.

원래(元來) 국제법상(國際法上)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라는 말은 현실적(現實的) 정착(定着)(physical settlement을 의미(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적(實地的)계속적(繼續的) 및 평화적(平和的)인 국가기능(國家機能)의 표시(表示)를 지칭(指稱)하는 기술적(技術的) 용어(用語)이다. 이러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에 관한 지도적(指導的) 판례(判例)로 인정(認定)되는 전기(前記) 여기 판례(判例)에도 이와 같은 지표(指標)는 공통적(共通的)으로 인정(認定)되고 있다. 즉 주권(主權)의 행사(行使) 내지 표시(表示), 평화적(平和的)일 것, 실제적(實際的)일 것, 주권(主權)에 대하여 유효(有效)한 권원(權原)을 부여(賦與)하기에 충분(充分)할 것, 계속적(繼續的)일 것 등이다[각주:57]. 이 네가지 요건(要件)을 차례로 검토(檢討)함으로써 과연(果然) 일본(日本)의 선점(先占) 또는 편입(編入)이라는 것이 현행(現行) 국제법상(國際法上)으로 볼지라도 (현행(現行)의 국제법(國際法)에 대하여 많은 의문(疑問)이 있지만) 타당(妥當)한 것인지를 고찰(考察)하려 한다.

주권(主權)의 행사(行使)가 평화적(平和的)일 것.

주권(主權)의 최초(最初)의 주장(主張)이 타국(他國)의 현실적(現實的) 점유(占有)의 강탈(强奪)이 아니어야 하며, 처음부터 주권(主權)의 경쟁적(競爭的) 행위(行爲)에 의하여 반박(反駁)되지 않은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 이 규칙(規則)의 의미(意味)이다. 단순(單純)한 항의(抗議)(protest)가 이러한 주권(主權)의 평화적(平和的) 성격(性格)을 변경(變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CIJ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Norway로부터의 단순(單純)한 항의(抗議)Denmark의 국가활동(國家活動)의 표시(表示)가 평화적(平和的) 성격(性格)을 가진 것을 변경(變更)하지 않는다[각주:58]고 하였다. 이러한 주권행사(主權行使)의 평화적(平和的) 기원(起源)은 점령(占領)(선점(先占))과 시효(時效)를 구분(區分)하는 표준(標準)으로 인정(認定)된다.

일본(日本)의 이른바 독도(獨島) 편입(編入)내지 선점(先占)은 이와같은 평화적(平和的)요건(要件)을 충족(充足)하지 못한 것이 확실(確實)하다. 왜냐하면 독도(獨島)는 이상(以上)의 모든 증거(證據)로 보아 한국(韓國)의 영토(領土)인 것이 명백(明白)하므로 일본(日本)의 편입조치(編入措置)타국(他國)의 현실적(現實的) 점유(占有)의 강탈(强奪)에 해당(該當)하며 이와같은 한국(韓國)의 주권(主權)이 주장(主張)되고 있는 이상(以上) 주권(主權)의 경쟁적(競爭的) 행위(行爲)에 의하여 반박(反駁)되고 있는 것도 또한 부인(否認)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주권(主權)의 행사(行使)는 실제적(實際的)일 것

이 요건(要件)은 주권(主權)의 행사(行使)가 본격적(本格的)인 것이며 단순(單純)한 지상청구(紙上請求)가 아니라야 된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The Clipperton case의 중재자(仲裁者)는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에 관한 표준(標準)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목상(名目上)이 아닌 실제적(實際的)animus occupandi이외(以外)에 법()의 효력(效力)을 가진 immemotial usage에 의하여 점유(占有)를 행()하는 것은 점령(占領)의 필요조건(必要條件)이다. 이 점령(占領)은 행위(行爲)(또는 일련(一連)의 행위(行爲))로써 구성(構成)되는데 이러한 행위(行爲)에 의하여 점령국(占領國)은 문제(問題)의 영토(領土)를 점유물(占有物)(possession)로 변형(變形)시키는 것이며 그곳에서 배타적(排他的) 권위(權威)를 행사(行使)하기 시작한다.[각주:59]

그런데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에 요구(要求)되는 주권(主權)의 실제적(實際的) 행사(行使)가 어느 정도(程度)라야 하는가는 장소(場所)의 성격(性格)에 따라 다르다. 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PCIJ인구(人口)가 희박(稀薄)하고 주민(住民)이 없는 지역(地域)에서 경쟁(競爭)이 없는 경우에는 주권(主權)의 대단(大端)히 적은 실제적(實際的) 행사(行使)라도 족()하다고 하였다[각주:60]. 이것은 바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장소성(場所性)이라고 함직하다. The Clipperton Island case에서도 만약(萬若)에 어느 영토(領土)가 전연(全然) 사람이 거주(居住)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事實)에 의하여 점령국(占領國)이 그곳에서 출현(出現)한 당시(當時)부터 그 국가(國家)의 절대적(絶對的)이고 다툴 수 없는 처분(處分)에 좌우(左右)되었다면 그때부터 점유(占有)는 완성(完成)되었다고 생각되어야 하며 동시(同時)에 점령(占領)은 그것으로써 완성(完成)된 것이다[각주:61]라고 하였다. 이것은 역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장소성(場所性)을 표현(表現)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엄격(嚴格)히 말해서 보통(普通)의 경우에는 자국법(自國法)의 준수(遵守)를 확보(確保)할 수 있는 조직(組織)을 수립(樹立)하였을 때 비로소 점유(占有)가 완성(完成)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장소(場所)에 따라서는 이와같은 조치(措置)가 불필요(不必要)하다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판결(判決)은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기본적(基本的) 원칙(原則)에 절대(絶對)로 모순(矛盾)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판결(判決)이 지적(指摘)한 점()은 사람이 거주(居住)하지 않는 지역(地域)에서는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나 영토주권(領土主權)을 위하여 필요(必要)한 기본조건(基本條件)을 충족(充足)하기 위하여는 비교적(比較的) 적은 주권(主權)의 행사(行使)로써도 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The Clipperton Island case는 전기(前記) The Eastern Greenlad case와 같은 취지(趣旨)의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에 관한 장소성(場所性)을 인정(認定)하고 있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 명백(明白)하다.

Schwarzenberger도 관할권(管轄權)이 영역(領域)의 모든 부분(部分), 어떠한 순간(瞬間)에도 행사(行使)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적당(適當)하지도 않거니와 필요(必要)하지도 않다고[각주:62] 주장(主張)한다. 이 점()에 있어서 Max Huber판사(判事)The Palmas case에서 권리(權利)의 유지(維持)와 모순(矛盾)되지 않는 주권행사(主權行使)의 계속(繼續)과 중단(中斷)은 당해지역(當該地域)에 거주(居住)할 수 있는가, 거주(居住)할 수 없는가, 또는 그 지역(地域)이 명백(明白)하게 주권행사(主權行使)가 되어 있어 영역(領域)에 포함(包含)되어 있는가, 또는 그것에 반()하여 공해(公海)로부터 용이(容易)하게 접근(接近)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각주:63]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효적(實效的) 지배(支配)로서 가장 강력(强力)한 군사적(軍事的) 지배(支配)에 관해서는 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Basdevant판사(判事)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효적(實效的) 군사지배(軍事支配)를 행사(行使)한다는 것은 반드시 거주(居住)하고 있지 않는, 또는 거주(居住)하지 않는 장소(場所)에 현실적(現實的)으로 수비대(守備隊)를 두는 것을 의미(意味)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목적(目的)을 위하여 자유(自由)로히 그 지역(地域)을 보지(保持)하고 그 지역(地域)을 점유(占有)하려고 하는 타국(他國)을 배제(排除)하는 힘으로써 충분(充分)하다. 그것은 전적(全的)으로 지역적(地域的) 필요성(必要性)에 달려 있다.[각주:64]

독도(獨島)는 사람이 거주(居住)하지 않는, 또 사람이 거주(居住)할 수 없는 무인도(無人島)이다. 따라서 독도(獨島)에 대한 한국(韓國)의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 내지 주권행사(主權行使)에는 보통 유인도(有人島)의 경우에 볼 수 있는 행정조직(行政組織)이나 군비(軍備)가 기타(其他)의 실제적(實際的) 행동(行動)이 과다(過多)하게 요구(要求)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고래(古來)부터 한국인(韓國人)은 독도(獨島)를 울릉도(鬱陵島)의 속도(屬島)로서 인식(認識)해 왔고 어로(漁撈) 기타(其他)의 활동(活動)을 통하여 효과적(效果的)으로 이용(利用)해 왔다. 독도(獨島)가 울릉도(鬱陵島)의 관할구역(管轄區域)에 속()한다는 근대적(近代的) 입법조치(立法措置)도 이미 1900년에 즉 1905년 이전(以前)에 일본(日本)보다 앞서 행()한 바 있다[각주:65]. 이러한 모든 사실(事實)을 고려(考慮)할 때 분명(分明)히 독도(獨島)에 대한 한국(韓國)의 주권(主權)은 완성(完成)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1905()에 와서 일본(日本)이 독도(獨島)편입(編入)또는 선점(先占)하였다는 것은 명백(明白)히 완성(完成)된 권원(權原)의 찬탈(簒奪)이고 침략(侵略)이다. 일본(日本)이 즐겨 쓰는 이른바 근대적(近代的) 권원(權原)으로 대체(代替)하였다는 저 1905년의 편입(編入)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의 그러한 대체(代替)된 권원(權原)과는 본질적(本質的)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가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을 비판(批判)하는 것은 그 원칙(原則) 자체(自體)를 부인(否認)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국(文明國)에 의한 유인(有人) 무주지(無主地)의 선점(先占)이나 또는 타국(他國)의 영토(領土)소속불명(所屬不明)이라고 제멋대로 규정(規定)하여 선점법규(先占法規)를 적용(適用)하는 것과 같은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國家)에 의한 식민지(植民地) 침략(侵略)의 도구(道具)로서의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을 타기(唾棄)하는 것이다. 일본(日本)이 행()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실체(實體)는 이러한 침략적(侵略的) 제사실(諸事實)에 불과(不過)한 까닭에 국제법상(國際法上)의 효과(效果)를 발생(發生)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主張)이다.

주권국가(主權國家)에 대한 침략(侵略)이라는 용어(用語)의 사용(使用)은 물론(勿論) 경솔히 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일본(日本) 외무성(外務省)독도편입(獨島編入)을 침략행위(侵略行爲)라고 하는 것과 같은 주권국가(主權國家)에 대한 중대(重大)한 비난(非難)은 가장 고도(高度)의 확실성(確實性)을 가지고 입증(立證)되어야 하며 한국(韓國)이 전연(全然) 사실(事實)에 반()하는 독단(獨斷)으로써 이러한 비난(非難)을 행()하는 것은 단연(斷然)코 용인(容認)할 수 없다[각주:66]고 오히려 전책임(全責任)을 한국(韓國)에 전가(轉嫁)하려는 태도(態度)에 이르러서는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침략(侵略)이라고 하는 것은 국제법상(國際法上) 정의(定義)하기가 대단히 곤란(困難)한 것이나, 대체로 타국(他國)에 대한 강력(强力)의 자발적(自發的) 적용(適用) 또는 그 적용(適用)의 위협하(威脅下)에서 정당(正當)한 이유(理由)있는 또는 정당(正當)한 이유(理由)가 없는 요구(要求)를 관철(貫徹)하기 위하여 현상(現狀)의 변경(變更)을 초래(招來)하려고 노력(努力)하는 일국(一國)의 대외적(對外的) 행동(行動)이다[각주:67]라는 정의(定義)에 비추어 본다면 일본(日本)의 한국병합(韓國倂合)은 말할 것도 없고 독도편입(獨島編入)도 침략(侵略)이 아니라고 부인(否認)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독도편입(獨島編入)을 단순(單純)한 독자적(獨自的) 행동(行動)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병합(韓國倂合)의 일환(一環)으로 파악(把握)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반문(反問)하노니 일본(日本)의 그러한 한국병합(韓國倂合)이 침략(侵略)이 아니라고 한다면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어떠한 합법적(合法的) 행위(行爲)로서 설명(說明)된다는 말인가[각주:68].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장소성(場所性)과 아울러 유의(留意)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要素)는 이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을 제약(制約)하는 제한성(際限性)의 존재이다. 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PCIJ가 주권(主權)의 표시(表示)나 행사(行使)의 양자(兩者)를 주장(主張)했을 뿐만 아니라 일정(一定)한 조약(條約)Denmarkanimus occupandi가 표시(表示)되어 있는 것을 발견(發見)하고 이것을 중시(重視)하였다. 조약상(條約上) 타국(他國)의 영유(領有)로 확정(確定)된 지역(地域)에 대해서는 설사(設使) 이 지역(地域)에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를 계속했다 할지라도 그 타국(他國)의 유기(遺棄)(abandoment)의 의사(意思)가 증명(證明)되지 않는 한() 주권(主權)의 이전(移轉)을 추정(推定)할 수는 없는 것이다[각주:69]. The Frontier case를 볼지라도 계쟁지역(係爭地域)에 대한 주권행사(主權行使)Holland가 하였지만 그것이 국경조약(國境條約)에 의하여 Belgium()에 귀속(歸屬)된다고 판정(判定)되었다. ICJ가 이 사건(事件)에서 채용(採用)된 행위(行爲)는 대부분(大部分) 지방적(地方的) 관리(官吏)에 의하여 수행(遂行)된 일상적(日常的) 행정적(行政的) 성질(性質)의 것이며, 더욱이 국경조약(國境條約)에 반하여 Holland가 그 측량도(測量圖)에 계쟁지역(係爭地域)을 게재(揭載)한 결과(結果)이다. 이러한 행위(行爲)는 국경조약(國境條約)에 의하야 확립(確立)Belgium의 주권(主權)을 배제(排除)하기에는 불충분(不充分)하다[각주:70]고 한 것은 시역(是亦) 조약(條約)으로 인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제한(制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日本)의 독도(獨島) 편입(編入)내지는 선점(先占)이 한국(韓國)의 권원(權原)에 대한 찬탈(簒奪)이며 침략(侵略)이라는 presumption(추정(推定))을 받고 있는 한, 이러한 prima facie evidence는 일본(日本)의 반증(反證)에 의하여 그것이 폭력(暴力)과 강요(强要)에 의하여 약취(掠取)된 것은 아니라는 확증(確證)이 제시(提示)되어야 한다. 그러한 거증책임(擧證責任)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일본(日本)이 독도(獨島)에 대하여 아무리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를 행()했다 할지라도 The Frontier case에서 보는 바와 같은 국제약정(國際約定)(Cairo 선언(宣言) - Potsdam 선언(宣言) - 항복문서(降伏文書))에 의한 제한성(制限性)에 복종(服從)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에서 보는 바와 같은 증거(證據)의 상대적(相對的) 힘을 교량(較量)평가(評價)하는 relative strengt of evidence의 원칙(原則)은 적용(適用)될 수 없다.

주권(主權)의 행사(行使)나 표시(表示)는 주권(主權)에 대하여 유효(有效)한 권원(權原)을 부여(賦與)하기에 충분(充分)한 것일 것.

PCIJ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계속적(繼續的) 기간(其間)동안의 Denmark의 활동(活動)을 평가(評價)하면서 그 활동(活動)주권(主權)에 대하여 유효(有效)한 권원(權原)을 부여(賦與)하기에 충분(充分)한 것인지의 여부(與否)의 문제(問題)에 관하여 각시기(各時期)마다 그것을 측정(測定)하였다[각주:71].

PCIJ는 국가활동(國家活動)이란 진정(眞正)으로 국제적(國際的) 주권자(主權者)로서 행동(行動)했다고 주장(主張)한 자가 그러한 환경하(環境下)에서도 그렇게 행동(行動)하였으리라는 것을 증시(證示)할 만한 것 이상(以上)의 것을 중심(中心)에 두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각주:72]. 유효(有效)한 권원(權原)을 부여(賦與)하는데 필요(必要)한 국가활동(國家活動)의 정도(程度)는 각() 영토(領土)의 사정(事情)에 따라 변화(變化)한다는 판결(判決)에는 전원일치(全員一致)를 보고 있다. ()는 영토(領土)의 사정(事情)에 상응(相應)한 방법(方法)으로 국가기능(國家機能)을 표시(表示)하면 족()하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 있어서 무인소도(無人小島)인 독도(獨島)의 경우 상기(上記)의 모든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한국(韓國)의 독도(獨島)에 대한 국가적(國家的) 기능(機能)을 충분(充分)히 표시(表示)한 것으로 인정(認定)되는 것이다.

주권(主權)의 행사(行使)나 표시(表示)는 계속적일 것.

The Palmas Island caseThe Eastern Greenland case에서 국제법정(國際法廷)은 국가활동(國家活動)의 표시(表示)의 계속성(繼續性)유기(遺棄)의 문제(問題)와는 별도(別途)로 점령(占領)에 의한 권원(權原)에 있어서의 구성요소(構成要素)라고 보았다. 원칙적(原則的)으로 말하면 국가활동(國家活動)의 계속성(繼續性)을 증시(證示)하지 못할 경우 이것은 권원포기(權原抛棄)의 의사(意思)의 증거(證據)가 되는 것이며 이 의사(意思)의 여부(與否)에 불구(不拘)하고점령(占領)에 대한 확정적(確定的) 권원(權原)의 증거(證據)에 의하여 치명적(致命的)인 것이 된다[각주:73].

그러나 점령(占領)에 관한 계속성(繼續性)의 정도(程度)는 충분성(充分性)의 정도(程度)와 같이 사정(事情)에 따라서 다르다. 원칙상(原則上) 계속적(繼續的)이라 할지라도 주권(主權)은 사실(事實)에 있어서 어느 순간(瞬間) 어느 영토(領土)의 지점(地點)에도 행사(行使)될 수는 없다. 권리(權利)의 유지(維持)와 양립(兩立)될 수 없는 단속(斷續)과 중단(中斷)은 주민(住民)이 있는 지역(地域)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다르며, 또 주권(主權)이 논의(論意)의 여지(餘地)없이 표시(表示)된 영토내(領土內)에 포위(包圍)되어 있는 지역(地域)인가 아닌가, 또는 공해(公海)로부터 접근(接近)할 수 있는 지역(地域)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다르다라는[각주:74] Max Huber의 공식(公式) 이곳에 적용(適用)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원칙(原則)에 따라 불규칙적(不規則的)이고 비교적(比較的) 장기적(長期的)인 간격(間隔)의 주권표시(主權表示)The Palmas caseThe Eastern Greenland case의 양자(兩者)에 있어서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를 위하여 충분(充分)하다고 판결(判決)되었다. The Clipperton case또 이 원칙(原則)의 극단적(極端的)인 예이지만 이 원칙(原則)에 따라 Franc의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가 인정(認定)되었다.

상기(上記)의 원칙(原則)에 비추어 볼 때 한국(韓國)의 독도(獨島)에 대한 계속적(繼續的)인 주권표시(主權表示)는 충족(充足)된 것으로 보인다. 울릉도(鬱陵島)에 대한 상당기간(相當其間)의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인하여 독도(獨島)에의 왕래(往來)가 일시(一時) 중단(中斷)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계속인 주권행사(主權行使)나 표시(表示)를 위하여 문제(問題)되는 것은 아니다. 공도정책(空島政策)도 하나의 국가정책(國家政策)인 이상(以上) 울릉도(鬱陵島) 및 독도(獨島)에 대한 유기(遺棄)의 의사(意思)는 추정(推定)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섬이 원격(遠隔)한 무인도(無人島)라는 지리적(地理的) 조건(條件)을 감안(勘案)할 때 공도정책(空島政策)의 시대(時代) 및 그 전후(前後)에 있어서의 독도(獨島)에 대한 한국(韓國) 및 한국인(韓國人)의 활동(活動)은 그 주권표시(主權表示)의 계속성(繼續性)의 원칙(原則)과 일치(一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왕복문서(往復文書)(특히 1962년 7월 13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p. 232. 이하; 일본학자(日本學者)로서는 개천광(皆川洸) 및 태수당정(太壽堂鼎)교수(敎授)의 전게(前揭) 각(各) 논문(論文). [본문으로]
  2. 왕복문서(往復文書)(특히 1959년 1월 7일자 한국측각서(韓國側覺書), p. 200. 이하. [본문으로]
  3. ICJ Reports, 1953, p. 53. [본문으로]
  4. 식전첩웅(植田捷雄), 전게논문(前揭論文) [본문으로]
  5. 왕복문서(往復文書)(1962년 7월 13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 232. [본문으로]
  6. Ibid., pp. 124~237. [본문으로]
  7. 유기의사(遺棄意思)(animus dereliquendi)또는 방기(放棄)(derelictio)의 의사(意思)는 확실(確實)히 증명(證明)되어야 한다. 「방기(放棄)는 영토상실(領土喪失)의 일방법(一方法)으로서 이것을 취득(取得)하는 일방법(一方法)인 점령(占領)(occupation)에 대응(對應)한다. 점령(占領)이 ① 영토(領土)의 실효적(實效的) 포기(抛棄), ② 이 영토(領土)에 대한 주권포기(主權抛棄)의 의사(意思)의 양자(兩者)가 필요(必要)하다」(Oppenheim-Lauterpact, International Law, 7th ed., vol. I, p. 531.). Roma법상(法上)의 derelictio는 소유자(所有者)가 그것과의 일절(一切)의 관계(關係)를 회복(回復)하거나 또는 유지(維持)하려는 의사(意思)를 갖지 않고 어느 장소(場所)를 떠날 때 발생(發生)한다. [본문으로]
  8. 「연안주민(沿岸住民)의 어업활동(漁業活動)에 관한 한(限) 개인(個人)은 자기자신(自己自身)의 이익(利益)을 위하여 그리고 정부(政府)로부터 하등(何等)의 권한(權限)도 위임(委任)받지 않고 자발적(自發的)으로 사업(事業)을 행(行)함으로써 국가(國家)에 주권(主權)을 부여(附與)할 수는 없다.」 Hsu Mo의 개별의견(個別意見), The Anglo-Norwegian Fisneries case, ICJ Reports, 1951, p. 157. [본문으로]
  9. 왕복문서(往復文書)(1962년 7월 13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 240. [본문으로]
  10. 일본외무성(日本外務省)편, 대일본외교문서(大日本外交文書), 제3권, p. 137. [본문으로]
  11. 산변건태랑(山邊建太郞), 죽도문제(竹島問題)역사적고찰(歷史的考察), コリア평론(評論), 제7권 제2호 (1965년 2월), p. 4. [본문으로]
  12. 주(註) (58) 참조. [본문으로]
  13. 왕복문서(往復文書)(1959년 1월 7일자 한국측각서(韓國側覺書)), p. 223. [본문으로]
  14. 「해외조사월보(海外調査月報)」 소화(昭和) 29년 11월호. [본문으로]
  15. 도근현발행(島根縣發行), 「죽도(竹島)연구(硏究)」, 왕복문서(往復文書)(1954년 2월 10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p. 70~71.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는 주(主)로 일본(日本)의 군사상(軍事上)의 이익(利益)에서 나온 것인데 로일(露日)의 전국(戰局)이 일본(日本)에 유리(有利)하게 전개(展開)됨에 따라 의정서(議定書)의 내용(內容)을 더욱 추진(推進)하여 「대한시정강령(對韓施政綱領)(1954년) 6항목(項目)에 걸치 경제침략(侵略)이 되었다. 이것이 전승(全勝)과 더불어 1905년의 이른바 「한국보호조약(韓國保護條約)」(제2차(第2차次)) 한일협약(韓日協約))으로 나아갔다. 요컨대 한국(韓國)의 「보호화(保護化)」는 1904년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의하여 제일보(第一步)를 내디뎠고 1907년의 제3차(第3次) 한일협약(韓日協約)으로 한국(韓國)의 내정권(內政權)까지 장악(掌握)했을 때 완성(完成)된 것이다. 그러나 실질상(實質上)의 보호화(保護化)는 이 의정서(議定書)에 의하여 결정(決定)되고 말았다. 산변(山邊), 전게(前揭)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 p. 157~158.」 [본문으로]
  16. 일본(日本)と 조선(朝鮮), アヅア・アフリカ강좌(講座) 제(第)3권(卷), p. 115. [본문으로]
  17. 일본외교연표(日本外交年表) 및 주요문서(主要文書). [본문으로]
  18. 왕복문서(往復文書)(1954년 9월 25일 한국측각서(韓國側覺書), p. 112. [본문으로]
  19. 산변(山邊), 전게서(前揭書), pp. 156~157. [본문으로]
  20. Schwarenberger, Title to Territory, AJIL, vol. 51 (1957), p. 221. [본문으로]
  21. 명치(明治) 38년 1월 28일 각의결정(閣議決定)에 의하면 명치(明治) 36년 이래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이란 자가 해도(該島)에 이주(移住)하여 어업(漁業)에 종사(從事)한 것은 관계서류(關係書類)에 의하여 명백(明白)한 바이므로 「국제법상(國際法上) 점령(占領)의 사실(事實)있는 것으로 인정(認定)하여 이것을 본방(本邦) 소속(所屬)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선점(先占)」법리(法理)를 적용(適用)하여 독도(獨島)를 일본령(日本領)으로 소속(所屬)시킨다는 것을 명백(明白)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日本)이 영토(領土)가 된 독도(獨島)를 근대국가(近代國家)의 행정구분(行政區分)에 따라 새로이 도근현(島根縣)의 소관(所管)으로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의 고의(故意)의 조작(造作)이다. [본문으로]
  22. 왕복문서(往復文書)(1962년 7월 13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 259. [본문으로]
  23. 예하면 전게(前揭) 식전첩웅(植田捷雄), 죽도(竹島)귀속(歸屬)をめぐる일한분쟁(日韓紛爭) (일교논총(一橋論叢) 제54권 제1호). [본문으로]
  24. 전전무이랑(田畑茂二郞), アジア・アフリカ신흥제국(新興諸國)と국제법(國際法)(사상(思想) 1965년 10월호. p.11) [본문으로]
  25. 국제법상(國際法上)의 선점(先占)의 법리(法理)의 形成과정에 관해서는, 태수당(太壽堂) 鼎, 국제법상(國際法上)선점(先占)について-そ 사적연구(史的硏究)(法學論叢(법학논총) 제61권 제2호). [본문으로]
  26. 원주민(原住民)의 거주지(居住地)는 terra nulius로 보고 이것을 선점(先占)에 의하여 획득(獲得)할 수 있다는 정당화(正當化)의 구실(口實)은 문명(文明)의 관념(觀念)에 구(求)한다. 즉, 미개민(未開民)을 보호(保護)하는 것은 백인(白人)(기독교국가(基督敎國家)의 국민(國民))의 책무(責務)이고 Europe문명(文明)이라고 생각되며, 이리하여 문명(文明)이라는 이름으로 즉 Europe의 지배(支配)가 긍정(肯定)되었다. 제국주의열강(帝國主義列强)의 식민지쟁탈과정(植民地爭奪過程)에서 형성(形成)된 이 선점(先占)의 법리(法理)에는 Europe문명(文明)과 자본주의경제체제(資本主義經濟體制)에의 신념(信念)이 결합(結合)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7. 15, 16세기(世紀)의 이른바 「지리상(地理上)의 발견(發見)」의 시대(時代)에 Europe인을 동양(東洋)에 진출(進出)케한 경제적(經濟的) 동인(動因)은 중상주의(重商主義) 근대국가(近代國家)의 상업자본(商業資本)과 그 시장(市場)으로서의 식민지(植民地)에 대한 욕구(欲求)였다. 이와 같은 Europe제국가간(諸國家間)의 관계(關係)를 규율(規律)하는 것으로서 점차(漸次) 형성(形成)되어온 것이 근대국제법(近代國際法)이다. Europe인은 그들의 국가(國家)는 모두 평등(平等)한 권리(權利)・의무(義務)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비Europe국가(國家)・비기독교인(非基督敎人)은 평등(平等)한 인간(人間)으로 보지 않았다. 비Europe인의 거주지(居住地)는 「무주지(無主地)」로서 「선점(先占)의 법리(法理)」에 의하여 식민지(植民地) 획득(獲得)의 대상(對象)으로 생각하였다. [본문으로]
  28. 예하면 1961년 12월 18일 India가 Portugal령(領) Goa를 무력(武力)으로써 탈취(奪取)하였다. UN의 토의(討議)에서 A・A제국(諸國)이 India의 무력행사(武力行使)를 지지(支持)한 것은 전통법규(傳統法規)에 대한 그들의 태도(態度)를 단적(端的)으로 표시(表示)한 것이다. Q. Wright는 이 점(點)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논(論)하고 있다. 「Goa문제(問題)에서 주목(注目)할 특징(特徵)은 신국가(新國家)의 다수(多數) 및 Soviet가 식민주의(植民主義)는 악(惡)이며 이것을 제거(除去)하기 위하여 힘을 사용(使用)하는 것은 허용(許容)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Asia・Africa를 통(通)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主張)된다. 즉 <기독교(基督敎) 군주(君主)의 소유(所有)에 속(屬)하지 않는 지역(地域)은 “무주(無主)의 토지(土地)”(territorium nulius)이며 원주민(原住民)의 희망(希望)과는 상관(相關)없이 법왕(法王)의 인허(認許)나 발견(發見), 선점(先占)에 의하여 영유(領有)할 수 있다는 발견시대(發見時代)에 지배적(支配的)이었던 이론(理論)위에 서서 힘에 의하여 영유(領有)되고 유지(維持)된 해외(海外)의 영역(領域)에 대한 식민국가(植民國家)의 주장(主張)의 유효성(有效性)을 이전(以前)의 식민지(植民地)의 인민(人民)에게 납득(納得)시킬 수 있다고는 기대(期待)할 수 없다>」. The Goa Incident AJIL, July 1962, p. 629. [본문으로]
  29.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에서 ICJ는 「본건(本件)을 재판(裁判)하기 위하여 역사적(歷史的) 논쟁(論爭)을 해결(解決)한 필요(必要)는 없다」고 말하고 설사(設使) Freance왕(王)이 Channel Islands에 고유(固有)의 봉건적(封建的) 권원(權原)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러한 권원(權原)은 1204년 및 그 후(後)의 사건(事件)의 결과(結果) 실효(失效)되었음이 분명(分明)하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고유(固有)의 봉건적(封建的) 권원(權原)은 대체당시(代替當時)의 법(法)에 따라 타(他)의 유효(有效)한 권원(權原)으로 대체(代替)된 것이 아니면 오늘날 어떠한 법률적(法律的) 효과(效果)도 발생(發生)시킬 수 없다. 대체(代替)의 입증책임(立證責任)은 France측에 있다」고 하였다. 일본(日本)은 이 Minquiers사건(事件)의 원칙(原則)을 원용(援用)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30. 주(註) (108) 참조. [본문으로]
  31. 왕복문서(往復文書)(1954년 2월 10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 77. [본문으로]
  32. 왕복문서(往復文書)(1954년 9월 25일자 한국측각서(韓國側覺書)), pp. 119~120. 이곳에서 한국정부(韓國政府)는 일본(日本)의 독도편입(獨島編入)에 관한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라고 하는 것이 외국(外國)에는 물론(勿論) 일본(日本)의 일반국민(一般國民)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증거(證據)로서 다음 예를 든다. 일본(日本)이 문부성(文部省)이 인가(認可)한 바 일본전국교육도서주식회사(日本全國敎育圖書株式會社)가 1952년 6월 10일에 발행(發行)한 표준세계지도(標準世界地圖)의 제6판(第6版)에는 한자(漢字) 죽도(竹島)의 음표(音表)로서 「다게시마」의 대신(代身) Roma자(字)로 Chukdo, 일본문자(日本文字)로 チユ-クド(Chiyu-Kudo)로만 써있다. 이와 같이 이 섬의 이름이 한국어(韓國語)의 발음(發音)으로 표기(表記)되어 있다는 것은 이 섬이 한국령(韓國領)임을 의미(意味)한다. 타면(他面) 독도(獨島)가 울릉도(鬱陵島)의 속도(屬島)였다고 하는 것은 「편입(編入)」당시(當時)의 문서(文書)에 완전(完全)히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를 편찬(編纂)한 일본학자(日本學者) 전연우언(田淵友彦)이가 명백(明白)히 언명(言明)하였다. 동서(同書)(제죽백과사전(帝國百科事典)) 134권(卷) 1906년 제2판) 308면(面)과 이 책(冊)에 첨부(添附)된 「한국전도(韓國全圖)」에서 죽도(竹島)(리앙고)를 한국속령(韓國屬領)으로 기술(記述)하였다. 또 일본해군성(日本海軍省) 편찬(編纂)의 한국연안수로지(韓國沿岸水路誌)(451면(面)으로부터 452면(面)까지 명치(明治) 40년 발간(發刊) 개정(改訂) 제2판(第2版))에는 「한국인(韓國人)은 송도(松島)라 서(書)하고 일본어민(日本漁民)은 <리앙고도(島)>라고 호칭(呼稱)하고 있다」라고 기재(記載)되어 있다. 이 사실(事實)로써만 보더라도 한국인(韓國人)은 「독도(獨島)」(돌섬)라고 하는 매우 적당(適當)한 이름을 사용(使用)하고 일본인(日本人)은 「리앙꾸르」라는 외래(外來)의 이름만을 사용(使用)하였다는 것을 일본정부(日本政府)(해군성(海軍省))가 인정(認定)하였다는 것을 충분(充分)히 표시(表示)하고 있다. 이 섬에 관한 역사적(歷史的)・현실적(現實的) 배경(背景)으로 판단(判斷)하여 대한민국정부(大韓民國政府)는 「죽도(竹島)가 옛적부터 일본영토(日本領土)의 일부(一部)이다」라는 일본정부(日本政府)의 결론(結論)이 무근(無根)이라고 확신(確信)하고 있다. 또 일본역사사전(日本歷史辭典)(제1권(第1卷)) 662면(面) C항(項) 16~17행(行) 참조)에는 현재(現在)의 죽도(竹島)라는 이름이 울릉도(鬱陵島)의 일속도(一屬島)의 호칭(呼稱)으로서 사용(使用)되어 있고 그 외국명(外國名) 「리앙꾸르」운운(云云)으로 기재(記載)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일본(日本)이 보통 「리앙고도(島)」라고 호칭(呼稱)한 죽도(竹島)가 울릉도(鬱陵島)의 속도(屬島)라는 사실(事實)은 이 사전(辭典)에 의하여 확인(確認)되어 있다. 이상(以上)의 여러 예시(例示) 이외(以外)에도 석미춘잉(石尾春芿)의 「조선(朝鮮)과 만주안내(滿洲案內)」(1953년, 소화(昭和) 10년)에는 「죽도(竹島)(독도(獨島))가 조선(朝鮮)의 동쪽 한계(限界)」라고 명기(明記)되어 있다. 위와 같은 명백(明白)한 사실(事實)로 묻노니 일본국민(日本國民)의 착오(錯誤)라고 강변(强辯)할 것인가. [본문으로]
  33. 천본수길(川本秀吉), 「독도(獨島)역사적법적지위(歷史的法的地位)」-독도(獨島)영유권(領有權)-(1960년) p. 30. [본문으로]
  34. 왕복문서(往復文書)(1956년 9월 20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 186. [본문으로]
  35. H. Briggs, The Law of Nations, 1952, p. 248.; 뿐만 아니라 France가 Clipperton에 주권(主權)을 선언(宣言)한 1858년 11월 당시(當時) 그 섬이 territorium nullius라는 법적지위(法的地位)에 있었고 따라서 선점(先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認定)할만한 이유가 있다. Ibid., p. 248; 이 사건(事件)에서 France의 선점(先占)의 타당성(妥當性)에 대한 의문(疑問)이 제기(提起)되었는데 그 이유(理由)는 타(他) 열강(列强)에 대한 통고(通告)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erlin의정서(議定書) 제34조에 포함(包含)된 통고(通告)의 의무(義務)는 이 사건(事件)에 적용(適用)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 당시(當時) 상기(上記)와 같은 France의 행동(行動)에 부여(附與)된 공시성(公示性)은 그것으로써 충분(充分)한 것으로 생각될만 하였고 France도 상기(上記) 행동(行動)을 공표(公表)함으로써 공시성(公示性)을 상실(喪失)하였다고 상상(想像)할 만한 이유(理由)도 없었다. 왜냐하면 Freance는 그 섬을 포기(抛棄)할 의사(意思)(animus)가 없었고, 또한 France가 적극적(積極的)인 방법(方法)으로 그 섬에 권력(權力)을 행사(行使)하지 않았다는 사실(事實)은 이미 결정적(決定的)으로 완성(完成)된 취득(取得)의 상실(喪失)을 의미(意味)하지 않기 때문이다. Ibid., p. 250. [본문으로]
  36. L.C. Green, International Law Through The Cases, p. 367. [본문으로]
  37. Johnes v. United States 1890. Dickinson, Case and Malerials on International Law, p. 210. [본문으로]
  38. Oppenheim-Lauterpacht, International Law, vol. I, 8th ed. (1955), p. 359. [본문으로]
  39. Guggenheim Traite de Droit Internationale Public, Tome I, p. 441.. [본문으로]
  40. R. Y. Jennings,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p. 39. [본문으로]
  41. Westlake, International Law, Part I (1904), pp. 100~101. [본문으로]
  42. 전강양일(全岡良一), 국제법강의(國際法講義), 상권(上卷)(소화(昭和) 30년), p. 338. [본문으로]
  43. Congo의정서(議定書) (1885년) 제34조. [본문으로]
  44. Schwarzenberger, Title to Territory, op. cit., p. 321. [본문으로]
  45. Hyde, International Law, vol. I, p. 343. [본문으로]
  46. 일본(日本)은 실효적(實效的)인 권력(權力)의 수립(樹立)으로서 다음 사실(事實)을 들고 있다. 1905년 8월 도근현지사(島根縣知事) 송영무길(松永武吉)에 의한 독도(獨島) 현장조사(現場調査). 1906년 3월 도근현청(島根縣聽) 제3부장(第3部長) 신전길태랑(神田吉太郞)에 의한 동일(同一)한 조사(調査), 1905년 5월 17일 정부소유토지(政府所有土地)로서 토지대장(土地臺帳)에 기입(記入), 독도(獨島)의 해려어업(海驢漁業)에 관하여는 1905년 4월 14일 도근현령면허증(島根縣令免許證)의 발급(發給), 1941년 전쟁(戰爭)에 의하여 중단(中斷)되기까지 사업(事業)은 계속(繼續)되었고 면허자(免許者)로부터 매년(每年) 토지사용료(土地使用料)가 국고(國庫)에 납입(納入)되었으며 그 간(間) 수차(數次)에 긍(亘)하여 어업통제규칙(漁業統制規則)이 개정(改定)되었다 한다. 1940년 8월 17일 해군재산(海軍財産)으로서 「오(吳)」해군기지(海軍基地)에 인계(引繼)되었고 기지사령관(基地司令官)은 팔번장사랑(八幡長四郞)이란 자(者)에게 사용지령(使用指令)을 포함(包含)한 명령서(命令書)를 교부(交付)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47. 미국(美國)은 1911년의 Mexico와의 Chamizal사건(事件)에서는 시효취득(時效取得)에 의한 권원(權原)을 주장(主張)하였으나 1938년의 Palmas도(島) 중재재판(仲裁裁判)에서는 국가간(國家間)에 있어서의 시효취득(時效取得)은 국제법상(國際法上) 확립(確立)되지 않았다고 거론(擧論)하였다. [본문으로]
  48. P.C. Jessup, The Palmas Island Arbitration, AJIL, vol. 22, pp. 739~740. [본문으로]
  49. PCIJ, Series, A/B, (1931), 53, pp. 45~46. [본문으로]
  50. Ibid., pp. 45~56. [본문으로]
  51. Dickinson, Cases and Materials on International Law, p. 184. [본문으로]
  52. ICJ Reports 1953, p. 57. [본문으로]
  53. Ibid., p. 56. [본문으로]
  54. ICJ Reports 1962, p. 15. [본문으로]
  55. Briggs, The Law of Nations, op. cit.., p. 249. [본문으로]
  56. Ibid., 246. [본문으로]
  57. Whiteman, Digital of International Law., p. 1032. [본문으로]
  58. PCIJ, Series A/B, 53 (1931), p. 62. [본문으로]
  59. AJIL, vol. 26 (1932). pp. 390, 393. [본문으로]
  60. PCIJ, Series A/B, 53, pp. 45~46.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단순(單純)한 주권행사(主權行使)의 주장(主張)이 점령(占領) 또는 점유행위(占有行爲)를 구성(構成)한다고 보지 않았다. [본문으로]
  61. Briggs, op. cit. p. 249 및 AJIL, vol. 26 (1932), p. 390. 단(但), 이 판결(判決)은 「실효적(實效的) 점유(占有)」의 원칙(原則)에 반(反)하는 것은 아니다. Oscar Svarlien, The Eastern Greenland case in Histroical Perspective p. 57. [본문으로]
  62. Schwarzenberger, Title, op. cit., p. 315; Max Hubber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AJIL, vol. 22 (1928), p. 877. [본문으로]
  63. AJIL, vol, 22 (2928), pp. 867, 877. [본문으로]
  64. CJ Reports 1953, Rep., p. 78. [본문으로]
  65. 광무(光武) 5년 1월 의정부총무국편(議政府(總務局編), 법학유편(法學類編), 속이(續貳), pp. 304~305. [본문으로]
  66. 왕복문서(往復文書)(1962년 7월 13일자 일본측각서(日本側覺書)), p. 266. [본문으로]
  67. Strupp-Schlochsuer, Worterbuch des Volkerrechts, Berlin, 1960, pp. 63~64. [본문으로]
  68. 일본(日本)의 한국병합(韓國倂合)은 「정복(征服)」(conquest)이라고 생각되는데 정복(征服)의 효력(效力)에 대해서는 Jennings, The Acquistion of Territory, pp. 52~67. Jennings는 이곳에서 정복(征服)에 의한 권원(權原)을 부인(否認)하고 있다. [본문으로]
  69. The Clipperton Island case에서도 중재자(仲裁者)인 Italy왕(王)은 「The Clipperton Islandsms 1858sus 11월 17일 France에 의해서 정당(正當)히 취득(取得)되었으며 France가 그 섬을 유기(遺棄)할 의사(意思)를 가지지 않은 이상(以上) 그 후(後)에 France가 유기(遺棄)에 의해서 그 권리(權利)를 상실(喪失)했다고 인정(認定)할만한 이유(理由)가 없다. France가 적극적(積極的)으로 주권(主權)을 행사(行使)하지 않았다는 사실(事實)은 이미 명확(明確)하게 완성(完成)된 취득(取得)을 포기(抛棄)하는 것을 의미(意味)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Hackworth, Digest of International Law, vol. I, (1940), p. 443. [본문으로]
  70. ICJ Reports 1959, p. 229. [본문으로]
  71. PCIJ, Series A/B, 53, (1931), pp. 51, 52, 54, 63. [본문으로]
  72. Verdross의 「실효성(實效性)」의 규칙(規則)에 관한 정의(定義)는 「보통으로 조직(組織)된 어떤 국가(國家)에 의해서도 유사(類似)한 사정하(事情下)에서는 그렇게 표시(表示)하였을 활동(活動)만을 표시(表示)하는 것」이다. Recueil de Courts, 30 (1929), p. 369. [본문으로]
  73. Whiteman, Digest of International Law, p. 1034. [본문으로]
  74. 주(註) (142)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