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2013. 8. 17. 00:34이따금 한문장

눈오는 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어느 여자의 이야기

 

어느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아주아주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두시간쯤 샅샅이 그녀를 잘 뒤적거리다 보면 그래도 그녀에게도 남과 다른 무언가가 있기 마련일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언제나 바알간 봉숭아물이 들어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봉숭아물들이기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녀가 열살이 되던 해에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가 고추장, 된장, 막장, 간장을 퍼다가 그녀의 집에 다니러 오셨습니다.

 

", 엄마두 참 이런 건 사먹으면 되는데...."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그녀의 어머니는 입을 함지막하게 벌리고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애미야! 우리 강아지는 어디있냐?"

 

할머니는 당신의 손녀딸을 찾았습니다. '강아지'란 별명은 5살때 그녀가 외갓집에 가서 동네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놀다가 놀다가 지쳐 개집에 엎어져 잠이 들어버린 데서 유래한 할머니만 부르는 그녀의 호칭이었습니다.

 

"걔 지금 자요"

 

"그러냐?"

 

할머니는 이튿날 시골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녀는 자고 일어나 보니 자신의 새끼손가락 두개가 비닐로 꽁꽁 묶여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엄마! 엄마! 이게 뭐야?"

 

"안돼! 벗기지마! 그건 봉숭아 물을 들이는 거란다. 외할머니가 너 잘때 해놓고 가셨단다."

 

"이거 하면 뭐가 좋아?"

 

"이쁘잖니"

 

"정말 이뻐?"

 

"그럼!"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얼굴이 안따라주면 손톱이라도 예뻐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나봅니다. 그녀는 다음날 비닐을 풀고서 바알갛게 물이든 손톱을 하루종일 들여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후로 매년 봄이 되면 외할머니는 올라오셔서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곱게 들여 주시고 내려가셨습니다.

 

그녀가 고등학교 일학년때의 일이었습니다. 점심을 까먹고 모두 모여앉아 그때에 한참 유명했던 소방차랑, 박남정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친구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보더니

 

"어머! 어머! 얘들아! 이것 좀 봐!!!"

 

그 친구는 마치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부스처럼 외쳤습니다.

 

"뭐니? 뭐야?"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얘 좀 봐! 손톱에 매니큐어 발랐어!"

 

"얘도 이게 무슨 매니큐어니? 너 김치 손으로 찢어 먹었지?"

 

"아니야! 떡볶기 고추장 같은데?"

 

"오늘 미술들었니? 벌써 물감을 칠갑을 하게?"

 

그녀는 반친구들의 찬란한 무식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아그들아! 이건 봉숭아물이란 거야. 봉숭아 물이 지워지기 전에 첫눈이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그녀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 나이때의 소녀들이란 '사랑'이라면 껌뻑 넘어갈 나이였기에 그날밤에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멀쩡히 도시에 잘 계시는 외할머니를 시골로 보내야 한다고 고함을 치질 않나, 돌아가신 할머니를 원망하며 산소에 가서 엎드려 울기도 하고, 비닐하우스에선 왜 봉숭아를 키우지 않느냐고 따지는 등 그녀의 봉숭아물의 여파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봉숭아물을 들이고 있는 사람은 전교에서 그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봄에 학교는 완전히 난리가 났습니다. 미남 교생선생님이 오신 것이었습니다. 거의 학교는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반아이들은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맸습니다. 교생선생님께 잘보일려고 파마를 하고 앉아있는 애도 있었고, 평소엔 멀쩡하게 밥만 잘먹던 애가 밥도 안먹고 개기다가 교생선생님 앞에서 픽 쓰러지기도 하고, 매일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조그만 교실로 몰려와 교생선생님이 학교에 들어오는 걸 창문으로 하염없이 지켜보는 애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암투가 교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행여 교생선생님이 말만 걸어도 그자리에서 넘어가는 애들때문에 불쌍한 교생선생님은 거의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자율학습시간에 교생선생님은 교실 맨 뒤에 앉아서 내일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떨려서 감히 뒤를 돌아다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열심히 문제만 풀고 있었습니다. 그녀라고 왜 잘생긴 교생선생님에게 마음이 안가겠습니까만은 어디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녀는 그저 표안내고 속으로만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마악 국어문제를 다 풀고 수학정석을 꺼내 펴는데 머리위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꿈속에서 그렇게도 그리던 교생선생님의 목소리였습니다.

 

"봉숭아 물이 참 이쁘게 들었구나. 우리 어머니도 옛날에 봉숭아 물을 들이시곤 했지"

 

조용하던 교실이 갑자기 웅성거러기 시작하고 몇몇 아이들은 입에 거품을 빠골빠골 내며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얼굴이 봉숭아처럼 바알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후로도 교생선생님은 대학교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를 보면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몇몇 몰상식한 아이들은 봉숭아물과 아주 흡사한 메니큐어를 바르거나, 김치국물에 손가락을 하루종일 담그고 교생선생님앞에서 손가락을 펼쳐보였지만 우리의 교생선생님은 현명하게도 가짜 봉숭아물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녀는 교생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편지라도 한번 쓸까하고 생각을 했으나 생각만하고 감히 부치지 못하고 애꿎은 편지지만 계속 사서 모았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첫사랑은 지나갔습니다. 그녀는 그해 겨울날 첫눈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무심하게도 첫눈은 이미 물이 다 빠져버린 후에야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교생선생님과는 인연이 아니다라고 체념하며 또 한해를 보냈습니다.

 

그녀의 외할머니께서는 다음해에도 다다음해에도 봄이면 올라오셔서 그녀에게 봉숭아 물을 들여주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미팅을 몇번 하고, 어쩌다 선배와 사랑을 할 뻔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일찌기 자기의 봉숭아물 들인 새끼손가락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과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쉽게 사랑을하지 못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때였습니다. 봄이면 올라오셔서 봉숭아 물을 들여주시던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아마도 올해를 넘기기가 힘들거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보았습니다. 여전히 그녀의 새끼손가락에는 바알간 봉숭아물이 곱게 들여져 있었습니다.

 

"이 봉숭아 물도 올해가 마지막이로구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가진 가장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서러워져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꼬박 34일을 울고서는 그녀는 올해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정하고, 사랑을 찾아 나섰습니다.

 

"내가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봉숭아 물이 지워지기 전에 첫눈이 올꺼야!"

 

그녀는 갑자기 미팅을 많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팅을 나가면 자신의 파트너가 노래방에 가서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을 힘차게 힘차게 불러도 그녀는 영문도 모른채 열심히 따라 부를 뿐이었습니다.

 

"거리엔 괜찮은 사람 많은 데 소개를 받으러 나간자리엔 어디서 이런 여자들만 놔아오는 그어야아 이야이야이야"

 

아무리 많은 남자들을 만나도 아무도 그녀의 새끼손가락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남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에 그녀는 우연히 지하철속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내리실 곳은 시청, 시청앞입니다."

 

그녀는 발디딜 틈 없는 그곳에서 겨우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녀가 신문을 사러 돌아서는 교생선생님을 본 것입니다.

 

"선생님!"

 

교생선생님은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른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습니다. 그제서야 선생님은 그녀를 알아보았습니다.

 

"선생님 어느 학교에 계세요?"

 

사람들에게 떠밀리면서 그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뚱뚱한 아줌마의 엉덩이를 비집고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학교로 발령받으셨어요?"

 

"넌 어느 학교 다니니?"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잠시 대답을 주저하더니 어딘가있을 그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다고 하시며 언젠가 우리다시 만나는 날엔 빛나는 열매를 보여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그녀가 내려야 할 역이 다가와 그녀는 아주아주 짧은 인사만을 남기도 내려야 했습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녀의 사랑찾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자신의 손가락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녀에 손톱에 봉숭아물은 아주 쬐금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수북히 쌓인 낙엽을 보면서 훌쩍훌쩍 눈물을 짓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11월의 마지막날 아침에 그녀는 다급히 그녀를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에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왜그래? 오늘 일요일이잖아?"

 

"빨리 일어나 씻어! 외할머니가 위독하시대!"

 

그녀는 순간 벌떡 일어났습니다.

 

"안돼!"

 

그녀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엄마의 손을 꼭 잡은채로 몇시간을 차를 타고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의 엄마와 그녀는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줄곧 눈물을 길에다 뿌리면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외할머니는 오후가 되자 다시 회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외삼촌이 아침에 의식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할머니 방에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방이 따뜻한가 보려고 이부자리밑에 손을 넣었습니다.

 

"에미냐?"

 

할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니에요. 저에요, 할머니!"

 

"어이고 우리 이쁜 강아지가 왔구나?"

 

"할머니 돌아가시면 안돼요! 내년에도 제손에 곱게 봉숭아 물을 들여주셔야죠!"

 

"그래, 그래."

 

그녀는 방을 나왔습니다. 외숙모가 부엌에서 나오다 말고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오마야! 우짜꼬마! 눈이 오네!"

 

"! 이거 첫눈이 오는 구마!"

 

외삼촌이 하늘을 보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을 보다가 문득 자기의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아주아주 쪼금 봉숭아물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녀는 빙그레 웃엇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아직 건강하신게 정말 다행스러웠습니다. 사랑이란 꼭 이성과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눈을 맞으며 산책이라도 할 겸 밖으로 나왔습니다.

 

동네에는 아이들과 강아지들인 정신없이 눈을 맞으며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걷던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받았습니다. 정말 눈내리는 시골마을의 풍경은 아름다웠습니다.

 

"이봐요."

 

누가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뒤돌아 보았습니다.

 

"어머! 선생님!"

 

이게 누굽니까? 교생선생님이 거기에 서있었습니다.

 

"왠일이세요?"

 

선생님은 이 마을로 발령을 받아왔다고 답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선생님과 눈을 함께 맞으며 걸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마을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말까지 하더니 문득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손 좀 내밀어봐."

 

그녀는 추워서 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손을 가만히 내밀었습니다.

 

"여전히 봉숭아 물을 들이는 구나. 이런! 아직 조금 남아있구나!"

 

그녀는 밝게 웃었습니다. 선생님도 따라 웃었습니다.

 

"이젠 봄이면 할머님이 올라가시는 것 보단 니가 이리로 내려와서 봉숭아 물을 들이고 가렴."

 

"그럴께요 (선생님도 뵙고요)"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얀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 선생님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